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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샤오강, 기억을 그리는 화가

1. 역사의 격변기, 관료의 아들로 태어난 예술가

   
▲ Before the rain, 1981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장 샤오강(zhang xiaogang)’은 1958년 중국 남서부 윈난성에서 당 관료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알려져 있다시피 그가 태어난 1950년대 후반부터 근 30년간의 중국은 그야말로 아수라판이었다. 인민 수천만을 굶겨 죽인 대약진 운동, 중국의 문화적 근간을 통째로 파괴한 문화대혁명, 그리고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까지. 이렇게 생애전반을 꿰뚫는 일련의 사건들은 불가피하게 화가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샤오강이 9살 되던 해부터 10년간 지속된 문화대혁명은 특유의 예술적 감수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 역할을 한다. 어린 시절 사상검증 때문에 자신과 형제들로부터 멀리 보내졌던 부모와의 경험, 열네 살 무렵 ‘농부교육(하방)’을 위해 강제로 시골에 보내졌던 일 등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 임의로 해체되거나 재구성되어야 했던 ‘개인’과 ‘가족’의 개념은 훗날 그의 굵직한 연작들에 핵심적인 모티브가 된다.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찾는 1990년대 초까지 그의 작업은 긴 자기탐색의 단계를 거친다. 스무살이 되던 1978년 쓰촨미술대학 유화과에 입학하고 서양 모더니즘 회화를 탐구하기 시작하는데, 그 기저에는 당시 중국 주류 미술계에서 지배적이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즉 “중국식 혁명적 화풍”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1976년 문화혁명이 종식되면서 마오쩌둥식 전체주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유입된 서구의 개인주의와 표현주의 문화에 젊은 세대들이 눈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닥다리 이데올로기가 되어가던 마오쩌둥식 혁명론을 여전히 신봉하는 교수들에게서 샤오강과 그의 동기들은 일종의 환멸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인상주의와 큐비즘, 초현실주의 화가들로부터 샤오강은 큰 영향을 받게 되고, 그 흔적은 1980년대 초반 졸업 전시에 걸렸던 초기작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고흐, 밀레, 피카소와 달리 등은 그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훗날 샤오강 회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빛 이미지’와 ‘몽환적이고 기이한 인물표현’의 단서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 Gui Shan, 1984
   
▲ The Ghost Between Black and White 2, 1984

 한편 1982년 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샤오강은 암흑기를 맞게 된다. ‘혁명적 스타일’을 거스르는 자신의 그림 때문에 교수 임용에서 탈락된 것. 사회로부터 자신이 부정당했다는 느낌을 준 이 경험으로 그는 우울증을 앓게 된다. 이후 일정한 커리어 없이 건설 현장 노동자, 예술 감독 등의 직업을 전전하다가, 자화상을 그린 1983년 무렵 알코올 중독으로 몸 상태가 악화되면서 이듬해에 입원 치료를 받게 된다. 병원생활을 하며 그는 끊임없는 열패감과 싸워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특히 정신분열증 환자였던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는 그를 죽음에 천착하도록 만든다. 작가 스스로가 ‘암흑기(Dark Era)’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이 때 그려진 작품들은 일관적으로 죽음에 대한 집착, 분열증적인 형태를 보인다. 병원의 흰 커튼과 침대시트를 두른 유령이 등장하는 ‘The ghost between black and white’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그 시기 나의 영감은 주로 병원에서 느꼈던 감정들로부터 나왔습니다. 내가 흰 침대위에 누워있을 때, 그 흰 색의 시트 위에서 나는 마치 유령 같은 모습의, 수많은 환자들이 비좁은 병실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것을 보았어요.

밤이 찾아오면 온 병원에 신음소리가 울리고, 주위의 쇠약한 육체들은 마침내 쓸모없어지거나 죽음의 직전으로 내몰리고 있었죠. 이것이 나의 마음을 깊숙이 헤집어 놓았어요. 그들의 모습은 내가 겪어온 삶의 경험들과, 그 틈에서 외롭고 비참했던 나의 영혼을 너무 닮아있던 것이죠.”

   
▲ The Dark Trilogy : Fear, Meditation, Sorrow, 1989

 한편, 중국 사회에서 1980년대는 문화혁명으로 훼손된 여러 가지 윤리 질서와 공동체를 회복시키려는 열망이 부풀어 오르던 시기였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고위관료들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를 규탄하는 시위가 연일 열리고, 각종 검열과 선동 정책으로 숙청되거나 낙인찍힌 인사들을 재평가하고 명예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홍위병의 반달리즘에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문을 닫고, 체제 선전에 반하는 창작물은 모조리 탄압받아야 했던 예술계도 마찬가지였다. 1985년 시작된 뉴 웨이브(85′ New Wave)는 이렇게 훼손된 예술현장을 재건하려는 몸부림이었다. ‘혁명적 리얼리즘’을 벗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고, 샤오강에게 이런 움직임은 커다란 구원 신호가 되었다. 이후 동료 미술인들과 함께 미술 동인을 조직한 그는 천안문 사태로 뉴 웨이브가 종식 될 때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3년간 중국 주요 도시들에서 해 마다 200회 가까운 전시와 수많은 미학 컨퍼런스가 개최되는데, 그 중 1989년 2월 베이징 중국 미술관에서 열린 ‘중국 아방가르드’ 미술전은 이러한 동향을 총 집약하는, 중국 현대 미술사에 커다란 방점을 찍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이 전시를 통해 90년대 이후 중국 현대 미술 시장을 견인하는 여러 화가들이 성장하는데, 샤오강 역시 이들 중 하나였고 이런 흐름 덕분이었는지 그는 1988년 수년 전 좌절된 모교의 교수 자리에 임명된다.

 그러나 잔뜩 눌렀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점점 더 많은 자유, 더 많은 개방에 목말라하는 외침은 마침내 덩샤오핑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 1989년 6월, 이른바 ‘천안문 사태’의 발발이었다. 시위진압을 넘어서 무고한 시민들과 외국인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희생된 이 날의 사건은 중국 인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지점을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이는 곧 ‘뉴 웨이브’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BBC, CNN 등의 외신을 통해 전세계로 생중계된 학살의 몽타주는 새로운 사회주의 이상을 부르짖던 목소리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다시 삼엄하게 강화된 각종 검열 정책과 처형 소식들은 샤오강을 또 한 차례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다.

2. ‘중국인 화가’ 샤오강의 정체성을 찾다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사진회화. (ⓒSFMOMA)

2차 세계대전 직후 동독 지역에서 태어나 나치즘과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경험한 리히터는 이념 논쟁을 극도로 혐오하고, 양식화와 정형화를 거부했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샤오강이 지금의 그림 ‘스타일’을 만든 것은 1992년 다녀온 독일여행 이후다. 그는 두 가지 상반된 교훈을 얻고 돌아오는데, 첫 번째는 자신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서양 인상주의 그림들에 대한 실망이었고, 두 번째는 독일 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사진회화가 준 새로운 영감이었다. 학부 시절 여러 백과들과 학술지를 통해 공부했던 그림들을 직접 보고난 뒤 그는 크게 실망한다. 19세기 말에 걸쳐 등장한 미술사조인 인상주의와 초현실주의는 유럽을 비롯한 주류 미술계에서 오래전 ‘한 물간’ 흐름이었던 것.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나름의 ‘아방가르드’미술을 추구했다고 믿었던 샤오강으로서는 회의감에 빠질 만한 사실이었다. 사물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인상주의는 1980년대에 이르러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질문―즉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로 변모하고 있었다. 동독 출신의 리히터는 당시 그러한 미술사적 흐름의 중심에 있던 미술가였다.

 샤오강은 그 해 카셀(Kassel)지역에서 열린 도큐멘타(Documenta) 전시에서 리히터의 그림을 처음 접하게 된다. 이 때 그의 작품들은 캔버스 위에 영사기로 사진을 투사해 똑같이 그린 뒤, 그 위에 다시 붓질을 가해 1. 추상화를 만들거나 2. 전체 이미지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어 버리는 독특한 작업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렇게 완성된 사진회화는 사진이 보여주는 시각 이미지에 대한 믿음―‘우리가 보는 것은 사물의 실재다’―을 의심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샤오강에게 큰 충격을 안긴다. 그동안 자신이 추구해왔던 ‘중국식 아방가르드’를 넘어서는, 새로운 현대미술의 경계를 맞닥뜨린 것이다. 이 날의 경험은 그에게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해준다. 막연하게 추구했던 ‘탈이념’의 작업방식을 버리고, “가장 중국적인 것―동시에 그 속에서 가장 ‘나’다울 수 있는 것”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 Tiananmen no. 2, 1993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는 ‘중국인’ 예술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 과도기적 결과물이 바로 <천안문 시리즈(Tiananmen Square Series)>다. 중국 근현대사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천안문’을 가운데 두고, 역사적 주체로서의 국가와 사회, 개인의 관계를 이해해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고민의 해답은 엉뚱하게도 천안문이 아니라 어느 날 우연히 보게 된 ‘가족사진’에서 나온다. 대다수가 그의 어린 시절이었던 1950년대 ~ 1960년대 사이, 즉 문혁시기에 찍힌 것들이었다. 이 사진들은 모두 전문 사진관에서 촬영된 만큼 그 시대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했던’ 사진 양식―배경과 소품, 당시 유행했던 의복―을 취하고 있었다. 시쳇말로 ‘판에 박힌’, 어느 집에나 있을법한 모습의 가족사진이었던 셈. 그러나 그가 사진 뭉치 속에서 처녀 시절의 어머니 사진(마오쩌둥 체제 이전에 촬영된 것)을 발견하면서 ‘가족사진’은 그에게 특별한 예술 소재가 된다.

 샤오강이 어릴 적 그의 어머니는 조현병(정신분열)을 앓았는데, 병의 특성상 우상 숭배와 이데올로기 신격화가 극에 달했던 문화혁명은 이를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처녀시절의 어머니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반대로 매우 온화하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이었던 것. 가족사진 속에서 무언가 ‘걸러진’ 듯한, 즉 엄격히 통제받고 있는 듯한 표정의 어머니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과연 두 장의 사진이 찍힌 20여년 사이에 어머니에게서 ‘무엇’이 사라진 걸까? 문혁시기에 찍힌 사진 속에서 어머니가 ‘내보여서는 안되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작가의 실험은 여기서, 즉 사진의 모순적인 특성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사진이미지는 일차적으로 대상의 생김새를 그대로 재현하지만, 그 안에 찍는 사람의 의지가 개입되면 피사체의 개성을 취사선택해 특정 부분을 과장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즉 카메라가 찍은 ‘나’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것이라기보다, 찍는 이가 ‘바라보는 나’, 혹은 그가 ‘보고 싶어 하는 나’에 가깝다는 것. 이것은 사진이 체제 선전용 도구로 사용되는 데에 탁월한 근거를 제공한다. 훈련받은 전문 사진사의 연출에 맞춰 촬영되는 가족사진은 그런 전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프레임에 특히 민감하고, 종속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 사진의 느낌과 구조가 어느 집의 것이든 특색 없이 빤하다는 건 거꾸로 말해 ‘누가 보아도 거슬리지 않는’, 당을 비롯한 사회주의 공동체가 ‘보고 싶어 하는’ 가족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샤오강은 이렇게 연출된 사진 이미지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된 요소들(인물의 사적인 감정, 느낌, 체제와 관련된 기억)을 복원함으로써 자신의 오랜 질문―사회주의 국가 ‘중국’ 안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한다. 그 시작은 자신의 가족사진을 그림으로 옮기고, 형제들과 어머니의 얼굴 위에 색을 입히는 것이었다.

   
▲ Blood line-Big family : Comrades no.7, 1996

 그는 가족사진 외에도 당시 길거리에서 흔하게 팔리던 무채색의 그림들을 사서 그 위에 다시 물감 작업을 하는 식의 습작을 했는데, 이처럼 사진을 회화로 재현하고 다시 그 위에 작가 나름의 해석을 가미하는 방식은 리히터의 사진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어쨌거나 이러한 발상이 여러 습작의 과정을 거쳐 구체화된 것이 그 유명한 <혈연-대가족(Blood Line-Big Family)>시리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다. 생김새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결 같은 표정 탓에 흡사 복제된 인물군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은 전체적으로 그림을 지배하는 무채색 때문에 더 강조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가느다란 빨간색 실선이 인물들의 귀나 코, 가슴팍 따위에서 이어져 나와 신경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마치 심전도 그래프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시리즈 제목에 적힌 ‘혈연(Blood Line)’이다. 이 가느다란 ‘혈연’은 종종 화면(캔버스) 밖까지 뻗어나가는데, 작가는 이것이 그림 속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그림 밖의” 인물들―즉 조상 세대, 사진에 찍히지 않은 나머지 가족, 혹은 같은 사회주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중국 인민―과의 연결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이 가족사진은 사진 속 구성원들 뿐 아니라 이들의 숨겨진 가계(Genogram)까지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의 부제가 ‘대가족(Big Family)’인 이유다.

 한편 ‘얼룩’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인물들 위로 전체적인 그림의 색감과 전혀 다른 색의 빛이 드리워져 있거나, 2. 얼굴 한 부분이 마치 ‘물이 빠진 것처럼’ 얼룩져 있는 식의 표현이다. ‘혈연’이 그림 속 인물들을 둘러싼 여러 입체적인 관계들을 드러낸다면, 얼룩은 시대적 폭력이 개인에게 입힌 ‘상처’, 내지는 ‘트라우마’를 의미한다. 무채색으로 통일된 페인팅 위에 노란 색, 흰 색이나 붉은 색 계열의 이질적인 ‘빛 얼룩(stain of light)’을 얹음으로써 익명의 인물이 가진 ‘사적인(private)’ 기억들을 그림 속에 소환하는 것. 이처럼 인간의 기억을 얼룩의 형태로 표현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작가의 인식이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필연적으로 삶이란 매 순간 과거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인 만큼, 폭력적인 기억도 결국 원형을 잃고 파편화되거나 왜곡되어서 마치 ‘얼룩처럼’ 부분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국가와 국민 사이에는 ‘문화대혁명’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는 아주 복잡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중국은 이를테면 하나의 가족과 같아요. 대가족이요.

모든 구성원은 서로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구조죠. 이것이 바로 제가 관심을 가졌던 주제이고, 이후 이러한 관심은 점차 ‘문화대혁명’과의 단일적인 연결고리를 벗어나 (그런 역사적 격변기를 통과한) 중국 사람들의 개별적인 심리상태, 기억에 관한 문제로 나아가기 시작했어요.“

 이처럼 사회 공동체로서의 중국을 하나의 가족으로 비유해 ‘중국인’의 정체성을 질문하는 샤오강의 작업은 해외에서 먼저 관심을 받는다. 1991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두 차례의 전시는 프랑스, 영국 등을 비롯한 여러 서방 국가들의 러브콜을 받았고, 중국 현대사와 밀접한 대만과 홍콩의 미술계도 점차 샤오강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후 1994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자신의 <혈연-대가족>시리즈를 세계무대에 선보인 샤오강은 마침내 1997년 쓰촨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3. 2000년대의 작업 ~ 최근의 활동 경향

   
▲ Amnesia and Memory, 2003

 ‘문화혁명’이라는 틀 안에서 개인의 존재의미를 탐색하던 샤오강의 관심은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인간의 개별적인 ‘기억’을 다루는 문제로 옮겨간다. 이 시기 그려진 작품들이 이른 바 <망각과 기억(Amnesia and Memories)>, <인 앤 아웃(In-Out)>, 그리고 <기술(Description)>시리즈다. 특히 <인 앤 아웃>, <기술> 연작에서는 회화에 사진이미지의 특성을 접목시키는 샤오강의 방식이 좀 더 발전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중에서도 <인 앤 아웃> 작품들은 상당수가 리히터의 사진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 In-Out series no.2, 2006
   
▲ Amnesia and Memories-Notes, 2003
   
▲ In-Out series no.6, 2006
   
▲ Heroic Sons and Daughters series no.6, 2006(
series)
   

▲ Green Wall Boy and TV, 2008

 <망각과 기억>시리즈를 먼저 보면, 그 기본적인 작업 모토는 <대가족>시리즈의 연장선에 있다. 어두운 톤으로 통일된 페인팅 위에 ‘빛 얼룩(stain of light)’을 얹음으로써 기억 이미지를 삽입하는 것이다. 다만 화가가 거시적 차원의 관계론을 넘어 개개인의 심리묘사 문제를 깊이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이 때 부터는 가족단위나 둘씩 짝 지은 군상 말고도 소년(혹은 소녀) 한 사람만 등장하는 그림들(특히 2003년부터 2007년 사이)이 다수 그려진다. 즉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부각시키는 그림이 등장하는 것. 이 그림들은 상당수가 ‘무제(Untitled)’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혹자는 이를 묶어 ‘소년 시리즈(Untitled Series)’라고도 하는데, 이전의 인물화보다 한층 명상적인 표정이 강화되고 ‘빛’의 느낌이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중의 대다수가 바로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이다.)

 한편 인물 사진의 형식을 벗어난 그림들도 그려지기 시작한다. 텔레비전, 확성기, 글귀가 적힌 메모지, 불이 들어온 전구, 엎질러진 잉크병 등 상징적인 소재들이 반복해서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텔레비전과 메모, 확성기는 체제 선전을 위한 매스미디어를, 전구, 잉크병 등은 얼룩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일생을 꿰뚫는 ‘시간’과 ‘기억’을 암시한다. (이렇게 특정 사물들을 반복적으로 작품 속에 넣는 방식은 작가가 1980년대 후반 그림에 포커 카드, 염소 등을 계속 등장시키던 것과 같은 선상에 있다.) 이 사물들은 정물화 형식으로 그려진 <망각과 기억>에서 그림의 중심 소재로 배열되거나, 풍경화 시리즈 <인 앤 아웃>에서는 장면의 내러티브를 함축하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기술(Description)>시리즈와 <인 앤 아웃(In-Out)>시리즈는 앞서 언급했듯 ‘샤오강식’ 사진회화가 어디까지 발전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인 앤 아웃>시리즈에서 샤오강은 본인의 유년 시절 기억을 작품의 소재로 쓰기 시작하는데, 특정 사물(소파, 옛 공관건물 등)이 연상시킨 과거의 장면을 그린 뒤 다시 그것을 흐려버리는 붓질을 더하는 작업이다. 누군가 채 마르지 않은 캔버스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낸 듯, 뿌옇거나 경계가 엉겨 붙어 사물들의 분간이 힘든 화면을 보다보면 중년이 된 샤오강이 지난 시대의 기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사유는 오래전 유행했던 영화나 드라마의 필름 위에 역사적 사실과 관련된 스토리를 써넣은 <기술>연작에서도 유효하다.

 최근 몇 년 사이 화가의 관심사는 그간 자신이 작업한 것들을 3차원의 공간으로 옮기는 데 이르렀다. 자신의 여러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실물보다 큰 크기의 청동조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 50대를 훌쩍 넘긴 그는 이제야 비로소, 혼란하고 불안정했던, 하지만 정체모를 향수로 가득했던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올 준비가 된 것 같다. 심오한 표정과 ‘기형적인’ 인체비율을 자랑하는 ‘샤오강’식 인물상이 현실세계로 튀어나오면서 만들어낼 이슈들이 사뭇 궁금해지는 이유다.

 유한한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도덕과 이성이 불안의 근원을 해소할 수 있을 거란 근대의 환상도 보잘 것 없이 깨져버린 시대에서, 점점 더 불가항력적으로만 느껴지는 세계의 구조를 절망 없이 이해하려면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하는 것일까. 평생 자신이 속한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 정체성 때문에 고뇌했던 이 화가의 그림이, 오래전 이념의 죽음을 목격한 요즘 세대에게도 위안을 주는 이유는 뭘까. 비록 시대의 판은 다를지언정 20세기의 그와 21세기의 우리는 같은 불안을 앓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시의 멈춤도 없이 흘러가버리는 역사와, 멋대로 잊혀가는 나. 그 불공정한 서사 속에서 무던히도 살아내야 한다는 인간 생애의 딜레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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