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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티스트매거진=박수인]영화의 제목의 의미부터 알아보자면 펄프픽션이란 1896년부터 1950년대 사이에 주로 나오던 펄프 매거진에 실리는 싸구려 소설이라는 뜻이다. 타란티노는 영화 시작부터 이 영화는 싸구려이니 그냥 재미있게만 보세요 라고 쐐기를 박아놓고 있는 것 같다. 싸구려잡지 속 싸구려 소설이 두터운 수요를 기반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타란티노는 어떻게 이 펄프를 아트픽션으로 승화시켜 기존의 수요층을 넘어 어떤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였을까?
먼저 영화 표면상으로 드러나는 이야기 구조를 분석해보도록 하자.
1. 식당에서 두 연인이 식당에서 강도범행을 모의한다.
2. 빈센트와 줄스가 두목 마르셀라의 빚을 갚지 않은 파트너를 처리하러 간다.
3. 부치가 마르셀라와 계약을 하고 바에서 빈센트와 줄스를 만난다.
4. 빈센트가 마약상에 가 마약을 구매한다.
5. 3번에서 자신의 아내와 시간을 보내달라는 두목의 부탁을 받은 빈센트는 그의 집에 가 아내 미아와 좋은 시간을 보낸 후 집에서 마약을 한다. 미아는 마약 오용으로 인한 쇼크로 정신을 잃고, 빈센트는 마약상에 데리고 가 직접 주사바늘로 미아의 목숨을 구한다.
6. 부치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부고를 들으며 시계를 유품으로 받는다.
7. 부치는 권투시합을 앞두고 마르셀라와의 계약을 무시하고 연인과 도주를 계획하지만 유품으로 받은 시계를 챙기지 못했음을 알고 집으로 간다. 집에서 시계를 찾던 중 빈센트가 부치의 집을 방문하고 부치는 자신을 해하러 왔음을 알고 빈센트를 죽인다.
8. 부치가 시계를 찾고 연인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차를 타고 운전해가는 도중 우연히 신호등을 건너는 마르셀라와 조우한다. 둘은 격투를 벌이다 육탄전까지 하게 되고 우연히 전당포로 들어가게 된다.
9. 전당포는 사실 변태들의 소굴이었고, 부치와 마르셀라는 고문을 당한다. 마르셀라가 남자들에게 강간을 당하던 중 부치는 자신의 방을 탈출하여 전당포 무리들을 죽이고, 마르셀라도 구해준다. 마르셀라는 비밀을 지켜달라는 당부와 만나지 말자는 경고를 하고 둘은 작별한다.
10. 2번의 상황으로 돌아가 빈센트와 줄스가 파트너들을 죽이고 증거인멸을 한 후에 옷을 갈아입는다.
11. 갈아입은 옷을 입은 채로 밥을 먹는데 1번의 강도 커플을 만나게 되고, 빈센트와 줄스는 강도를 제압해 그들을 풀어준다.
이렇게 타란티노는 보통의 영화처럼 이야기를 11개의 조각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나눠진 이야기 조각들을 시간 순서에 어긋나도록 뒤죽박죽으로 나열을 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대로 재배치 해본다면, 6-2-10-1-11-3-4-5-7-8-9 이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는 이 영화의 새로운 양식에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준다. 이렇게 파편화된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사건의 우연성과 어처구니없음을 일련의 반발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미 시간의 흐름의 파괴로 우리는 논리적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지와 그를 바탕으로 형성된 논리가 끊김으로써 우리는 감독이 제시하는 펄프픽션 적 상황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생기는 것이다. 또 보여주는 이야기보다는 보여주지 않는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 조각과 조각 사이에 생략된 이야기가 훨씬 많기 때문에 언뜻 한 번 봐서는 이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잡기가 쉽지 않다. 이를 통해서 영화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보게 만드는 재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다.
영화의 기본구성도 사실은 회화이다. 미쟝센이라는 용어가 이를 잘 드러내준다. 미쟝센은 카메라 앞에 놓이는 모든 요소들, 즉 연기ㆍ분장ㆍ무대장치ㆍ의상ㆍ조명 등이 조화된 상태로 ‘화면 내의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관점에서 영화적 미학을 추구하는 공간연출을 말한다. 1 캔버스 안에는 화가가 의도하지 않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잭슨 폴록이 액션페인팅으로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의도하였던 것처럼, 다큐멘터리 영화도 의도하지 않은 것들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타란티노에게는 154분동안 이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타란티노는 준비된 자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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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펄프픽션 中 트위스트 장면 | ||
5번 이야기에서 빈센트와 미아는 바에 가서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나는 두 인물이 트위스트 춤을 추는 장면이 이 영화의 아우라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바는 실제 바가 아니라 타란티노가 직접 세트장을 만들어진 장소라고 한다. 무대와 배경 뿐만 아니라, 이전의 둘의 시시콜콜한 농담, 5달러짜리 밀크쉐이크, 미아의 당돌한 태도가 우리로 하여금 더 애정을 갖게 한다. 춤의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척 베리의 “You never can tell” 으로 화룡정점을 이룬다. 실제로도 트위스트 장면은 펄프픽션 하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킬링 씬이다. 사람들은 이 장면을 캡처하여 간직하고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로 재생산해낸다. 이전에 모나리자를 말로만 전해들어왔던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실제로 보기를 갈망하고, 실제로 모나리자를 마주하게 되었을 때 받는 경외감이 아우라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교과서나 싸구려 잡지에서도 수많은 모나리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나리자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수단이 바뀌었을 뿐 예술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재생산된 이미지를 보고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영화 전체를 보고싶어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영화를 찾아본다. 우리는 익숙한 이미지에 반가움을 느끼며 새로운 것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게 된다. 더욱 더 영화를 잘 받아들이게 되고, 이 장면을 둘러싼 이야기와 배경 음악들에 우리를 내던져 영화 자체에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스타성만을 이용하여 흥행을 노리고자 하는 영화들은 그 시기에만 잠깐 반짝일 수 있을 뿐 이다. 하지만 펄프픽션은 어떻게 20년이 넘도록 회자되고 점차 영화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가? 우리는 존 트라볼타와 사무엘 잭슨으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제시하고 있는 빈센트와 쥴스로 영화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2번 이야기 조각에서 차를 타고가면서 빈센트와 쥴스는 이야기를 나눈다. “암스테르담에서는 극장에서도 맥주를 파는데 플라스틱 컵이 아니라 유리잔에 판다. 파리에서는 맥도날드에서도 맥주를 판다. 쿼터파운드치즈버거는 뭐라고 부르는 줄 아냐? 로얄치즈 라고 한다.” 쥴스는 빈센트의 이야기에 킬킬 대면서 묻는다. “그럼 빅맥은 뭐라고 부르는데?” “빅맥은 그냥 빅맥이지. 르 빅맥” 쥴스는 또다시 킬킬 거리며 “르 빅맥” 이라 되새긴다. 이렇게 영화를 시시콜콜한 농담으로 채우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힘을 빼고 허세를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아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 욕구를 게워내고 무게를 내려놓는 데에는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두 인물은 선과 악과는 전혀 상관없다. 악을 물리치는 선의 인물이 아니여서 동일시도 느껴지지 않고 응원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두 캐릭터가 매력적이고 어떻게 이야기가 흘러갈지 궁금해질 뿐이다. 타란티노는 감독이 창조해 낸 인물의 힘이 얼마나 큰지 정통으로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봤듯, 시시콜콜한 이야기라 쉽게 보일 수는 있지만 타란티노는 영화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누구보다도 새로움을 갈망하는 감독처럼 보인다. 그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