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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rancis Alÿs, 출처=http://www.siobhandavies.com | ||
[디아티스트매거진=황희지] ‘걷기’라는 행위는 방랑자, 산책자, 산보객 등 다양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다. 걷기란 ‘생산지향적인 사회에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행위’이자 ‘목적지 없는 유목 상태’이며 심지어는 ‘발전 가능성의 반대항’으로 간주되어 왔다. 발전과 퇴보, 생산성과 비효율성이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의 ‘걷기’는 경제적 차원에서 성립된 위계질서를 교란시킨다.
프란시스 알리스의 작업은 ‘그저 걷는 일’로 이루어진다. 알리스의 걷기 행위는 ‘노동의 원칙으로부터 벗어나 생산하지 않음’으로써 작품을 생산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제시한다. ‘하지 않는 행위’라는 작가의 거부 의지는 단순한 무능의 이행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생산을 이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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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lector, 출처=http://www.flashartonline.com | ||
그의 작업 <컬렉터>는 강아지 모양의 자석 조형물로 지나가는 거리에 널려있는 쇠붙이들을 끌어 모아 온 몸에 붙이고 다니게 되어 있다. 또한 <흘리기>에서는 페인트 깡통에 구멍을 뚫어 ‘잭슨 폴락’식의 궤적을 만들며 도시를 배회했고 <동화>에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의 한 올을 풀어내면서 걸어 다녔다.
알리스는 걷는 일을 ‘우화’ 혹은 ‘이야기’라고 불렀고, 이를 ‘시적인 행위’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알리스가 걷는 장면을 본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고 누군가 봤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그것이 ‘미술’의 일환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미술 관객들은 알리스를 따라다니며 촬영한 동영상이나, 사진 혹은 간단한 이야기로만 작품을 접할 뿐이다. 이처럼 논리적 텍스트와 이미지가 아닌 파편적 구전으로 확산되는 전근대적 내러티브의 방식을 통해 알리스는 도시의 ‘신화’를 창조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작품을 생산한다.
알리스는 걸음으로써 도시에 개입한다. 이 도시들은 혼란함, 그리고 갈등을 포함하고 있는 장소이기 때문에 사회적, 정치적인 이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도시에서 걷는다는 건 근대적 자율성이나 개인적인 자유를 포함하며 소외된 계층에게 남은 유일한 이동의 수단이자, 인내와 생존을 위한 일상적 행위에 가깝다. 알리스는 자기 자신의 위치를 찾기 위한 개인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 점차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행위자로 심화된다.
알리스는 미술가에게 사회가 허락한 시적 면허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자, 과학자, 학자 혹은 정치 운동가와 달리 어떤 증명 없이도 선언할 수 있는 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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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 Green Line, 출처=https://imageobjecttext.com | ||
<그린 라인>은 알리스의 시적 면허로서 허용된 자유와 정치적 개입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 대표가 지도 위에 확정한 예루살렘 휴전선을 따라 초록 물감을 흘리며 걷는다. 작가는 가장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분쟁 지역에 스스로 개입한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그는 역사적인 갈등 상황에 내재한 부조리를 드러낸 이 작업에 <때로는 시적인 행동이 정치적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행동이 시적이 될 수 있다>는 부제를 붙였다.
시적 면허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뒤집는 반역을 시도하며, 정치적 의미가 있는 사회적 행동을 이끌어내 변화를 도모하고자 하지만 알리스는 그 행위를 시적 모호함으로 포장한다.
도시의 유목민-프란시스 알리스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지만, 스쳐 지나가는 상황, 그 어디에든 개입할 수 있다. 표류하는 상황에서 그의 발자국이 닿는 순간 도시는 우화로서, 신화로서 작가의 시적 장소로 변화한다.
<도플갱어>는 표류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만남의 상황을 포착하는 작업이다. 처음 가보는 도시에서 거리를 서성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발견해서 쫓아가는 이 프로젝트는 1999년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현재까지도 표류하고 있다. 도플갱어를 만나는 일시적 순간을 포착하지만 여전히 부유하는 과정은 감상자들에게 직접적인 변화를 주입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시적 행위의 모호함만을 제공하며 새로운 시각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둔다.
예술가이기에 허용되는 ‘시적면허’는 아이러니하게도 ‘행하지 않음=생산하지 않음’으로써 취득된다. 그의 걷기에 나타나는 우화적 성격을 대표하는 것은 바로 ‘일시적’이라는 점이다.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즉 완성된 모습을 가진 ‘생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관념적 이미지로서 예속되지 않는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일시적 긴장감은 관찰자로 하여금 정치적 장소로서의 도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