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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i47.tinypic.com | ||
[디아티스트매거진=김범진] 토니(오가타 이세이 분)는 그림자를 밟는다.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마다 찍히는 발자국은 그의 뒤에 남지만 그림자는 앞선다. 언제나 토니와 함께하는 그림자는 걸음에 보폭을 맞춘다. 그런 토니에게 그림자 같은 토니에게 인연이 찾아오고, 토니는 잠시 그를 등진 그림자 안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멈춘다.
지나가던 길에 잠시 들렀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사랑하는 그녀와의 한때는 말 그대로 지나갔는데 토니도 굳이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나아간다는 의지를 가지고 걸어오지도 않아왔거니와 그녀와의 시간이라는 일종의 일탈은 이후의 토니의 걸음마다 의문과 욕망과 허무함이 밟혀나가게 할 뿐 그의 걸음을 결코 멈추지는 못한다. 사랑했던 그녀의 몸만이 빠져나간 수많은 옷들에서는 외각의 유사함에서만 유추할 수 있는 그녀의 시각적인 흔적들만이 묻어날 뿐이고, 정작 그를 흔들었던 작은 파동은 그런 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음악도 옷들도 사진들도 모두는 당사자가 아닌 이상 상대방을 추억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매개로 기억을 되돌이켜 짚어보는 시간들에 남은 그녀 또는 아버지의 흔적은 기억의 결을 헤쳐내지 못하며 오히려 쓸쓸함과 상실감만을, 옷 안에 남은 그녀를 아니면 멜로디로 흘러갔던 아버지의 지나간 세월들만을 불러오기 때문에 유품에서 머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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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images.e-media.de | ||
추억은 향기가 되어 내일에 스며들고, 살아갈 날들을 걷다가 문득 비슷한 냄새에 발걸음을 멈추면 그렇게 그대로 그 냄새는 내일에서야 오늘을 기억하게 하는 책갈피가 된다. 언젠가 찾아올 그 날은 오늘과는 같지 않겠으나 얼마 없는 유사성의 조각이나마 긁어모아 둘의 닮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은 마음은 달리 말하면 비통함과 다르지 않다. 함께했던 토요일과 멀어졌던 일요일 사이, 자정에 잠시 스쳐간 짧은 바람은 찰나에 불과했던 시간을 수많았고 무한했던 날들로 기억하게 한다. 잠깐 머물렀던 향기가 삶의 모든 경로에 내려앉으면서, 어디로 향하든 어딜 가든 당시를 기억하게 하는 냄새에서 또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가 없으면서도 이것을 향기인지 아니면 폐기된 악취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본인이기에 보다 절망적으로 그렇게 자발적으로 그 냄새를 좇아 삶의 무게를 늘린다.
7월의 설렘도 2월의 기다림도 돌아오지 않은 세월에 대한 아쉬움도 모두 뒤로 하고 지금을 잊는다. 고독과 외로움과 지난했던 삶의 세월들과 가난한 기억들, 먼지도 나지 않을 정도로 풍화되어 빛바랜 흔적들로 채워진 삶보다도 쓸쓸한 것은 그러한 모양들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절망의 깊이는 그전까지 파내려온 묫자리의 깊이만큼이 아니라, 앞으로 파내어야 할 남은 깊이만큼 깊으며 그보다 더한 것은 무력하게 삽날을 바닥에 꽂아갈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바라보지 못하는 영화로운 삶까지의 거리감이다. 카메라는 줄곧 토니의 옆모습만을 비춘다. 단 한 장면, 토니가 살아 있는 아내와 보내는 짧은 시간의 장면만이 그러하지 않은데, 그 장면에서는 잠시 색이 돌아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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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itson.co.nz | ||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는 눈빛으로 조용히 주변을 관망하며 삶의 순간들을 터덜터덜 걸어 지나치던 토니의 눈은 삶의 기운이 꺼져가는 순간을 향해 지속적으로 끔벅끔벅 감긴다. 감정과 사상의 연속이 의미없던 죽음보다 나을 것이 딱히 없던 그의 삶은 정면을 바라보지 않는 카메라의 패닝처럼 망령처럼 흘러만 갔으며 토니는 그에 더해 삶의 움직임 자체에 무신경했다. 점도 높은 그의 삶의 수면은 쉽게 요동치지 않았으며 놓인 파동의 씨앗들은 머무른 시간만 조금씩 다를 뿐 가라앉기만 한다. 아버지도 아내도 그러했으며 찾아온 색채의 희망에서도 그의 삶은 결코 채도를 반영해내지 않는다.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그의 그림처럼 아니면 영혼처럼 토니의 삶 또한 결과적으로는 변함없이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밀하지 않은 것은 또 아니다. 그가 정밀하게 그려왔던 만큼의 치밀함이 바로 그의 삶의 점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토니가 원래의 삶으로 쉽게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토니의 삶이 겉보기에 고독해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동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럴 자격도 없다. 그의 선택은 사회적인 선택이 아닌 개인적인 선택이었으므로 우리는 그러한 삶의 당위성에 대해 논하기도 어렵다. 결국 그를 구원해내는 것은 아내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며, 다름 아닌 그의 삶 자체이다. 고독이나 외로움은 토니의 삶에 덧씌워진 이미지일 뿐, 삶의 짙음이 사랑의 그러함보다 짙었는지는 당사자만이 고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위로에 힘을 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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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wetalkaboutmovies.files.wordpress.com | ||
조명은 이미 어디에서부터 비추는지 그 방향을 잃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삶의 발자국에는 그림자가 남는다. 토니의 그림자가 토니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걸어온 삶의 발자국에는 발자국만의 그림자가 남아 외로움을 달래준다. 잠시 걸음을 멈춘 작은 흔적들에 남은 흔적의 흔적에서 토니가 찾은 것이 무엇인지는 그만이 알 수 있다. 공포는 인지하기 전까지는 아직 공포가 아니며, 그렇다는 것은 인지의 문제로 하강하는 바, 삶을 조망하는 토니의 시선은 그가 그려왔으며 앞으로도 그려갈 삶의 배경처럼 정밀하였기에 단조로웠고 그래서 그는 덜 혼란스러웠다. 슬픔에 대해 말이다.
(제목은 ‘Cigarette After Sex – Affection’ 에서 가져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