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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황녀의 소리없는 아우성, <덕혜옹주>

[디아티스트매거진=권오경]

<조국을 사랑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애국자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았다. 방청객 중 한 명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애국자임을 드러낼 기회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국민들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으로 운을 띄었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애국할 수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에 대해 진행자는, “물론 우리가 직접 독립운동을 하고, 폭탄을 던지고, 암살을 시도하는 것으로써 조국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투쟁의 움직임말고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ㅡ가령 선생은 올바른 교육을 위해 힘쓰고, 작가는 좋은 스토리를 위해, 배우는 좋은 연기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ㅡ을 통해 우리가 애국자임을 분명히 할 수 있다” 고 답했다.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애국자가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면 조선의 옹주로서의 책임은 무엇이었을까.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 살아가기에 얼마나 많은 수치와 분노를 짊어졌어야 했을까. <덕혜옹주>는 바로 이러한 의문을 조금이나마 해소해줄 영화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옹주의 소리없는 아우성에 희생된 인물들>

영화는 덕혜가 ‘능동적인’ 애국자임을 계속해서 보여주려한다. 한글 학교 설치에 대한 의지, 기모노 입기를 거부하는 모습, 그리고 친일파들에게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장면 등을 통해, 비록 그녀가 일본을 향한 직접적인 투쟁은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소리없는 아우성’을 외치고 있음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리없는 아우성’은 서사에 잔잔한 물결만 일게 할 뿐이기에 극적인 전개는 덕혜가 아닌 다른 인물들에게서 끌어와야만 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꽤나 많은 인물이 단기간에 등장해서 단기간에 사라진다. 그만큼 각 인물에게 몰입할 집중력이 얕아지고 캐릭터에게 빠져드는 감정이입도 방해된다. 단적인 예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온 독립투사가 총을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필사적으로 태극기를 꺼내 펼치는 장면에서 어쩐지 민망해진 건 나만이 아니었으리라. 그가 겪은 산전수전을 우리는 알리가 없다. 누군지도 모를 투사에게 단지 그가 민족의식이 높은 동포라는 이유만으로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관객은 드물다. 만일 그가 덕혜와 연관된, 그래서 그의 죽음이 주인공 덕혜에게 미칠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면 그가 꺼내든 태극기를 보고 울컥하지 않을 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냉정하게도) 그는 우리에게 애국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이보다는 덜하지만 김장한(박해일)또한 덕혜의 소리없는 아우성의 피해자이자 감독의 욕심에 희생된 인물이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인물로, 덕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지만 그 어떤 명쾌한 러브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그토록 덕혜를 찾아 헤맬만한 그럴싸한 감정선이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다. 어릴 적에 만나 뜨문뜨문 서로에 대한 호감이 비추어지는 것은 분명하나, 이것이 옹주를 대하는 충직한 국민으로서의 감정인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는 끔찍한 애정인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렇기에 장한이 끈질기게 옹주를 조선땅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이 결국 이루어졌을 때의 감격은 관객들사이에서 그다지 명쾌하게 터지지 않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감독은 분명 <덕혜옹주>가 덕혜와 장한의 러브라인으로 수렴하는 ‘멜로 영화’가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을 뿐더러 덕혜가 갖는 심리적 갈등만으로 장면을 이뤄나가는 ‘정적인 영화’ 가 되는 것도 탐탁지 않았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부수적 인물들을 등장시켰고 ‘상하이 망명’이라는 사건을 영화 속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이 인위적인 장치들은 안타깝게도 영화의 큰 뼈대, 덕혜옹주로 집중됐어야 할 뼈대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아무래도 표현해야 할 덕혜의 모습은 너무나 방대했던 반면에 (약 50년의 세월) 그 안에 담긴 그녀의 섬세한 감정들을 보여줄 만한 사건들은 적었기 때문에 감독은 이처럼 덕혜로부터 독립된 요소들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덕혜가 상하이 망명을 주도했다면 망명을 돕는 부수적인 인물들도 그녀를 중심으로 탄탄한 관계를 맺고 관객도 그녀와 동일한 감정상태로 이야기에 심리적 인과관계를 구축해냈을 수 있다. 영친왕의 망설임에 끝내 죽음을 맞는 장한의 숙부도, 다소 큰 비중을 차지할 것처럼 등장했지만 어느새 서사에서 쏙 빠져있는 덕혜의 조카도,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온 정체모를 독립투사까지도 모두 덕혜와 민족적 동질감이라는 이름 하에 살아있는 캐릭터가 됐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능동적인’ 덕혜옹주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의 핵심 사건(상하이 망명작전)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덕혜가 아니다. 덕혜는 그저 보여질 뿐이다. 그녀가 얼마나 민족의식이 강했는지, 얼마나 비극적인 삶을 살았는지, 가슴 속에 얼마나 많은 한을 품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는지 ‘수동적으로’ 보여질 뿐이다. 감독의 바람대로 영화가 멜로영화도, 액션영화도 되지 않기를 원했다면 아예  ‘덕혜옹주’ 라는 인물에 방점을 찍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 같다.

<옹주로서의 삶, 덕혜로서의 삶>

   
▲ 출처: 네이버 영화

물론 영화의 초점이 덕혜옹주에게 맞추어져 있기는 하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어중간한 멜로와 어중간한 액션으로 인해 그 초점이 분산되어 흐릿해져 버렸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덕혜옹주는 분명히 말한다. 자신은 조선의 옹주이기 전에 병든 어미의 딸이라고. 영화는 덕혜옹주가 갖는 이 두 가지 지위와 책임에 좀 더 집중했어야 했다. 자신을 마마라고 부르는 어머니에게 ‘덕혜야’ 라고 한번만 불러주기를 간절히 부탁하던 그녀의 눈빛을 영화는 조금 더 담아냈어야 했다. 옹주로서의 삶과 덕혜로서의 삶, 애국자로서의 삶과 평범한 여인으로서의 삶, 그 갈림길에서 갈등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얻는 감동과 슬픔은 배가 됐을 것이다. 딸이자 어머니로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도 있었던 그녀가 어떤 필사적인 이유로 ‘덕혜로서의 삶’을 내버리고 자신의 인생을 비극으로 몰아가면서까지 ‘옹주로서의 삶’을 놓아버릴 수 없었는지를, 영화는 우리에게 좀 더 보여주었어야만 한다. 아버지를 독살한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었다면 이에 대한 반복적인 덕혜의 괴로움을 장면에 삽입하거나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했던 추억에 대한 스토리가 보충되었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히 복순이와의 우정은 관객도 납득할 만큼의 사건과 감정이 드러났기에 노쇠한 덕혜옹주에게 ‘아기씨’ 라고 애절하게 숨죽여 외치는 복순이의 모습에서 조금이나마 감동할 수 있었다. 

   
▲ 출처: 네이버 영화

실제 인물을 중심으로 역사를 영화화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도 감독이 욕심을 조금만 덜어냈더라면, 혹은 아예 덕혜를 능동적인 인물로서 픽션화하기로 마음먹었더라면 어중간한 역사물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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