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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폐하여 완성시킨 각광의 역설 ― <사울의 아들>,2015

   
ⓒ 사울의 아들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디아티스트매거진=김민아] *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네마토그라프가 발명된 이후부터 영화란 결국 ‘보이는 것’에 국한된 역사였다. 특히 카메라 프레임을 통한 보여주기는 감독들이 차용해온 제일 편리한 편집 방식이자 현실과 가상을 구분 짓는 유일한 틀이었다. 아무도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세상을 두고 영화라 부르지 않는다. 이 예술은 단지 렌즈에 담긴 형상에 의해서만 규정되며, 기억된다. 요컨대 감독은 오직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현대 기술의 진보가 더 나은 장비 혹은 그래픽을 통해 영화가 추구해온 시각적 허영을 충실히 만족시켜 주었음은 부언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그러나 <사울의 아들>은 지난 세월 우리가 맺어온 무언의 대화법을 유유히 전복시켰다. 4:3 화면 비율은 작금의 인식에 따르면 지나치게 답답하고 35mm 필름 역시 구식이란 인상을 주기 충분하다. 매우 한정적이고 낡은 세계 속에서 관객이 선택 가능한 시야는 한낱 주인공의 뒷모습 정도다. 시점 숏이 일반화된 마당에 대부분의 장면을 인물에게 방해 받아가며 (러닝 타임 107분 동안 사울이 등장하지 않는 숏은 전부 합쳐 4분 남짓에 불과하다.)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경험임에 틀림없다. 카메라는 내내 사울의 뒤를 쫓는다. 보편적인 통념에 비추어 시선이란 곧 감독이 보내는 공공연한 메시지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존더코만도들이 속해있는 장소와 내부에서 벌어지는 참상은 뿌옇게 처리해버린 채 거의 모든 순간을 감추면서, 사건 안에 놓인 사울은 현장을 목격하고 있지만 관객은 심정적으로 개입할 수 없게 만드는 기이한 불합리성을 발생시켰다. 졸지에 기본적인 볼 권리마저 침해당한 관객은 어쩔 수 없이, 그리고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방관자의 위치를 넘어 극의 충격을 몸소 감당하기에 이른다. 아직도 자리에 앉아 적나라한 재현을 속절없이 기다리는가. 이제 아우슈비츠는 더 이상 극의 무대가 아니라 지금 여기, 바로 이 시간이다. 

대량 학살이 일어나고 비명이 난무하며 진종일 사체 더미가 소각되는 지옥에서의 일상이 가만히 눈만 뜨고 있다 해서 체감 가능한 공포일 리 만무하다. <사울의 아들>은 관객에게 깨어있기를 권유한다. 능동적으로 미행하고 상상한 나머지 기어이 알아차려 절망할 것을 종용한다. 기존 영화들이 노출하고픈 이미지를 수집해 나열했다면 라즐로 네메스 감독은 오히려 컷의 재구성을 배제하고 상황 전달에만 집중하여 결과적으로 시대를 체험하게끔 유도했다. 산소가 줄어드는 기분에 그만 다른 광경으로 눈 돌리고 싶어도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촬영 기법이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치밀한 작업 하에 구현된 생생한 현장음의 사용은 사울이 처한 생의 딜레마를 가감 없이 전이시킨다. 급기야 전체 부감 또는 풀 쇼트를 삽입하지 않았다는 점에선 약간의 폐소閉所 불안까지도 환기한다. 이 영화는 단적으로, 사울의 몸짓을 제외한 일체를 구경시킬 의도가 조금도 없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인물의 감정 또한 묘사되기보다 은닉당한 쪽에 가깝다. 다만 행동의 목적만은 명징하다. 사울은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인간의 존엄성이 통렬히 짓밟히는 장소에서 그는 굳이 랍비를 찾아 헤매고 (유대인 전통 장례법에 따르면 시신은 반드시 매장해야 하며 랍비는 그 곁에서 카디쉬, 즉 영혼을 위한 기도를 낭독하는 역을 도맡는다.) 아들에게 고결한 마지막을 안겨주려 노력한다. 이 비극적인 부성애에 오열은 없다. 도리어 애정인지도 의문스러운 책임감의 실상은 편집병적 광기를 닮아 있다. 영화는 사울의 심경을 드러내어 그의 집착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 행위에서 묻어나는 절실함을 역으로 추산해 내면의 깊이를 짐작하게끔 제의한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의미를 목도하는 것이야말로 <사울의 아들>을 지배하는 원리이자 본질이다. 등을 따라 걷던 카메라는 영화 중반부에 다다라서야 간신히 사울의 정면을 클로즈업한다. 그가 마주한 것은 반듯하게 누운 소년의 시신이다. 아들이 부검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시퀀스는 어떠한 슬픔도 내보이기 꺼려하는, 하물며 비통한 엔딩조차 숲에 울리는 총성으로 갈음하는 이 영화가 관객과의 대면을 용인한다는 차원에서 일종의 면회와도 같다. 사울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회귀하지만 잠시나마 그의 낯빛을 읽은 관객은 이후 도망가는 랍비를 잡으러 뛰게 될 구둣발이 얼마나 절박할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토록 공들여 주인공의 움직임을 조명하고 심지어 이외의 서사는 소거해버렸음에도 왜 영화 제목은 ‘사울’이 아닌 <사울의 아들>인가. 아들은 하루에도 무수한 목숨이 소멸하는 가스실에서 사울이 품었던 삶의 존엄에 대한 믿음, 그 최전방이며, 나아가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의 집약체이다. 죽은 소년이 진짜 사울의 아들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실제로 동료는 사울에게 “너는 아들이 없다”고 못을 박는다. 그래도 사울은 멈추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에서 멈춘다는 것은 최후, 자세히는 죽음과 동의어이다.

   
ⓒ 사울의 아들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사울이 처음으로 X가 그려진 재킷을 벗는 공간은 세면대가 놓인 거울 앞이다. 그는 그곳에서 손을 씻는다. 송장을 나르고 피로 얼룩진 바닥을 닦아댔던 손. 그때의 사울은 시체 처리반이라는 신분을 벗고 오롯이 한 남자로서 존재한다. 영화는 특별한 대사 없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저지르는 사울을 담을 따름이지만 관객은 그 맥락에서 아들의 시체를 빼돌린 뒤 재킷을 벗는, 손을 닦는, 침묵하는 찰나를 잡아내야 한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이제까지의 영화란 ‘보이는 것’에 국한된 역사였다. <사울의 아들>은 다르다. 헝가리 출신 감독의 이 놀라운 장편 데뷔작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려 끝내 보이길 포기한다.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간 세상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이 영화는 억울한 죽음들에 바치는 역대 가장 묵묵한 애도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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