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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 매거진=민소영]
“전쟁에선 진실이 첫 희생자이다.”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 중 한 명인 아이스킬로스의 말에서부터 이 영화는 출발한다. 어떠한 인용구로부터 시작하는 영화들은 참 많으나, 그 인용구에 빈 칸을 남김으로써 혼돈을 주고 더 큰 비참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영화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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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간 책임자로서의 장군, 한 아이의 아버지(알란 릭먼) | ||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어떠한 것이든 윤리적이며 도덕적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필자를 포함한 꽤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라 생각한다. 다소 비윤리적이거나, 인간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상대방을 저울질하며 겨냥하기 더욱 편리해진 I세대(Internet Generation)에 이 영화는 인류의 풀리지 않을 만한 숙제를 가지고 나와 참담함을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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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왜가리’작전 브리핑의 현장 | ||
영화의 발단은 이러하다, 케냐에 은신중인 테러주요인물 생포작전을 실시하던 중 폭탄테러를 준비하고 있음을 발견한 파월 대령(헬렌 미렌)은 이 작전을 사살작전으로 변경한다. 메인 멜로디에 변주로 해당 작전을 시행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대해 논하는 드론 조종사 와츠 중위(아론 폴), 벤슨 장군(알란 릭먼), 그리고 각국 고위 정치인들까지 합세해 완벽한 불협화음을 선사한다.
인간적인 면모라고 하면 대부분 테러조직 사살 때문에 희생될 아이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조종사 와츠 중위의 눈물을 이야기하겠지만 필자는 다르다. ‘인간적’ 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영화이기에, 그 날의 선택에 대해 우리는 그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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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곤충형 소형 드론을 통해 테러모의 현장을 주시하는 파월 대령(헬렌 미렌) | ||
필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것에 대해 논하기 이전, 각 인물들의 입장을 살펴보자. 파월 대령은 눈 앞에 대통령 위험인물 주요 2, 4, 5번이 존재하며, 자살폭탄조끼가 노출된 상황에서 해당 생포작전은 예외적으로 사살작전으로 승인되어야 함을 강력히 어필한다. 이에 대해 윗선의 보고만을 찾는 사람들이 다수이지만, 자신의 목소리가 강력하면서 동시에 중재자인 인물이 바로 이제 고인이 된 알란 릭먼이 중후한 목소리로 그 인물의 무게를 더한 벤슨 장군이다. 그는 회의실 내부의 고위 정치인들과 함께 모든 상황을 화면 너머로 관망하면서, 결정을 내리기 위한 의견과 논의를 집계해 파월 대령에게 전달한다. 타이핑으로 전달되는 명령에 대해 필자뿐만 아닌 꽤나 많은 관객이 답답함을 느꼈고, 간혹 실소가 터지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위치 때문에, 혹은 보여질 시선들 때문에 결정을 꺼리는 모든 고위 정치인들의 모습은 사람의 생명과 테러 앞에서도 속수무책인 ‘인간’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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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헬파이어 발사 앞에서 갈등하던 와츠 중위(아론 폴) | ||
‘인간적’인 모습은 사살 명령이 떨어지고 헬파이어를 쏘기 직전, 사격지점 충격치사범위에 들어온 아이를 와츠 중위가 발견하면서부터 가장 밑바닥에 존재한 개인들의 내면들을 통해 발현된다. 도덕적 잣대를 넘어선 인간 근본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언급하기 두려워한다. 소녀를 전쟁 속에서 피하게 하고자 벌어진 빵 소동 속에서 “빵을 살 사람을 보내요” 라는 말에 실소하는 관객들 틈 속에서 필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필자가 동정심이 더 강하며 ‘인간적’이라고 평할 수 없는 이유와도 동일하다.
모든 군인들과 고위 정치인들, 테러범들과 무고한 시민, 소녀 알리아까지 각자의 필요와 입장에 따라 삶을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인간적’인 삶에 선택이 개입하면 그 것은 타자에서 날선 무언가로 변해가기도 한다. 와츠 중위가 공군 입대를 결심한 것이 학자금 대출을 상환하기 위한 것이었듯, 그들이 사람의 목숨,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까지 달릴지 모를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도 각자의 입장들이 어쩔 수 없는 개인이라는 것에 크게 좌지우지되지 않던가. 미국과 영국 고위층들과 군인들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빵을 파는 알리아조차 그 범위 밖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만 주도하느냐, 아니면 수동적으로 결정된 희생양이냐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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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극단적인 종교의 억압 속에서 소녀 알리아를 교육시키는 아버지 | ||
치사율을 45%로 조작해 승인을 받아 날린 헬파이어였지만, 가장 중요한 소녀의 입장을 잊었다. 미국 영국에서 기초영양을 채운 아이들과는 달리 생존의 경계에서 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임을 잊었다는 것이 평소 NGO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접해온 필자의 뇌리에 가장 크게 맴돌았다. 소녀 알리아가 실려간 병원에는 심장 제동기마저 없는 의료기관의 부실함을 보여주며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영국에 사는 소녀였다면, 미국에 거주했더라면 치사율 45%가 맞았으리라. 튼실하고 큰 빵 같아 보이지만 내실은 진흙투성이임을 간과한 채, 치사율 5%도 100%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그렇게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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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정의 자리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고위 정부층과 벤슨 장군(알란 릭먼) | ||
비단 도덕적 잣대와 선택의 문제에 대해, 법적 정치적 시선을 논하며 선택을 회피하기만 하던 그들의 도착지는 자신의 입장과, 테러로 희생될지 모를 다수의 입장과, 그것을 도마에 올릴 모든 이들의 입장을 위한 한 아이의 희생이었다. 필자도 필자의 입장만을 주장하며 “이건 영화야” 라고 말하는 하나의 입장으로 전락한 기분이었다. ‘살인’으로 보이는 결정을 내렸을지 모르지만, 군인에게 전쟁의 대가를 모른다 말하지 말라던 장군은 회의실을 벗어나자마자 집에서 기다릴 아이에게 줄 애나벨 인형을 들고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변했다.
찝찝한 우리들의 마음에 이젠 고인이 된 알란릭먼의 중후한 목소리가 선택을 물었다. 한 인간이 그 수많은 입장들을 대변할 수 있느냐고. “NO”라는 대답을 알고 있기에 정해진 결말을 알면서도 그저 따라가지만, 오늘도 무수히 많은 개개인의 입장 속에서 오로지 ‘나’의 입장만을 펼치는 버튼을 누를 뿐인 필자를 발견한다. 전쟁에서 가장 큰 희생자는 진실이라 하지만, 과연 진실뿐 일까? “전쟁에서는 [ ]이 첫 희생자이다.” 빈칸의 검은 구멍 속엔 수많은 ‘나’들이 드글대고 있었다.
알란 릭먼을 추모하며,
In rememberance of Alan Rickman (1946.02.21 – 2016.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