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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tumblr.com | ||
[THE ARTIST 매거진=민소영]
현지시각 2016년 6월 19일,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 받던 배우 안톤 옐친이 세상을 떠났다. 사고로 인한 사망소식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일가견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펼친 배우로서 주목하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던 필자다. 한 때 그의 인터뷰를 읽고 감명받았던 부분을 소개하고, 그의 영화 인생에 대한 작은 담소를 열어 더 이상 볼 수 없는 연기의 상실을 위로하고자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Mr. Yelchin, 영화가 가진 궁극의 목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존재의 두려움과 살아가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영화는 이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꿈 같은 존재들을 채워주는 것이 목표여야 합니다. 다만, 신화적으로 해석하거나 해답을 제공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가 설계한 신화를 통해 답을 말하고, 삶과 존재의 의미를 지시해버리는 것이에요. 그 이미지를 정확하게 제시해버림으로 우리가 느끼는 공포를 완화시키고자 하는 것이죠. 아마도 현 세대 문화의 목표는 우리가 덜 공포를 느끼게 하고, 조금 더 용기 있게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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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fanpop.com | ||
처음 이 인터뷰를 접한 것이 몇 달 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영화가 가진 목표가 생각의 여지를 열고, 해답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것이라 믿어왔던 필자에게 그 어느 것도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던 안톤 옐친의 말은 크게 다가왔었다. 필자의 칼럼을 읽어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글의 내용은 일상과 밀접하여 특히나 감정의 흐름, 의식의 흐름에 크게 기대어 있다. 영화는 인생의 변화를 주기 위한 스파크와 같은 존재였었고, 대부분의 플롯에 자신의 모습과 삶을 빗대어 관람했다. 그런 필자에게 ‘위험하다’고 외침과 동시에 살며시 손을 잡아주던 안톤 옐친의 말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그의 작품들 속에도 녹아있다. 많은 배우들의 작품 선택 의도에 대해 항상 궁금하던 필자였는데, 안톤 옐친은 비교적 뚜렷한 편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인생관을 녹여낸 영화 4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안톤 옐친을 제대로 접한 첫 영화는 <라이크 크레이지(2011)>였다. 해외에 있던 친구의 추천으로 본 이 로맨스 아닌 로맨스는 온 마음이 찬 물에 젖어 무겁고 축축하게 만들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어린 나이라 사랑이라는 것을 접해보지 않았던 필자였고, 모두들 ‘슬프고 현실적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와 닿지 않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분명한 단 하나의 메시지는 관계에 온도가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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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화 라이크 크레이지 | ||
안톤 옐친을 추모하며 지난 이틀간 그의 작품들을 몰아보았고, 다시 경험한 이 영화는 미화시켜 신격화된 경험을 제공하거나 해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그의 말을 실감나게 했다. 행복한 연애의 경험 중 잠시 이별을 맞게 되는 연인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참 단순한 동물인지라, 그들은 되려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외로움을 더 크게 느끼며 갈구하게 된다. 그 과정 속에서 서로의 감정이 뜨거워지고 차가워지고를 반복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랑의 형태가 온도를 견디지 못해 변형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연인이 그토록 원하던 함께함을 이루었음에도 차가운 욕실 벽은 포옹하고 있는 부부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어 보이게 만든다. 사랑의 체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모습 속에서 그들이 감내하는 것은 ‘그래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했음’ 이라는 과거뿐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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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화 비버 | ||
실로 사람들은 인생 속에서 ‘과거’라는 것에 대한 해답을 얻고 싶어한다. ‘과거를 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가?’ ‘하지만 과거가 없다면 미래도 없지 않은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게 되는데 역시나 안톤 옐친은 이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영화 <비버(2011)>에서 한다. 필자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주제를 가진 무수히 많은 영화를 보았지만, 이만큼이나 해답을 주지 않고 물음만 던지는 영화는 처음 봤다. 우울증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무력함을 닮고 싶지 않아 방 안 켜켜이 그의 단점을 붙여 그 행동을 따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던 아들. 필자의 지인 중에도 이런 이가 있었기에 새삼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족, 그리고 관계에 대한 많은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사랑과 증오의 공존이다. 그런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를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앞에 그가 건넨 포옹은 ‘스토리의 개연성이 부족하다’ 는 느낌을 받을진 몰라도, 천만번 공감할 수 있는 울컥함이었다. 사실 감정에는 개연성이 없고, 해답이 없다. 답이 존재하지 않아서 이해되지 않는 극적인 결말에 일부 실망하는 이들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것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유일한 질문에 대한 또 다른 물음표일 뿐이다. 결론적인 해결은 없지만 그 해결이 없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삶이 이해와 사랑 속에서 그저 흘러 간다. 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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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화 러덜리스 | ||
‘안톤 옐친’,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하면 필자를 포함한 구독자 분들에게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러덜리스(2014)>일 것이다. 필자는 아직도 엔딩의 먹먹함을 잊을 수가 없다. 영화가 개봉하던 2015년, <위플래쉬>를 통해 경험한 카타르시스의 피날레와는 정반대였기에 더 여운이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여운이 아니라 충격이었다. 아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적이 없던 아버지가 아들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열었고, 그 과정 속에서 결국 그가 만난 것은 죽은 아들이 아닌 쿠엔틴(안톤 옐친)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죽은 아들이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는 것. 영화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른 채 가엾게 죽은 아들 때문에 망가진 아버지를 연상했지만, 부부가 아들의 무덤을 찾아가 ‘살인자’라는 욕설로 더렵혀진 아들의 묘비를 닦을 때 알 수 없는 감정의 동요를 경험한다. ‘과연 우리는 가해자의 가족이 느끼는 아픔까지 포용할 수 있는가?’ 이 영화 또한 정답을 건네지 않고 물음표만 남겨둔 채 무대를 떠난다. 아름다운 노래 앞에서 박수를 칠 수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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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영화 하우스 오브 디 | ||
사랑, 그리고 또 사랑, 그렇게 모든 영화는 인생을 통해 사랑이라는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영화 <하우스 오브 디(2004)>는 역방향을 질문을 던진다. 13살의 소년을 연기하기 위해 그 또래의 안톤 옐친이 저능아 역할의 로빈 윌리엄스와 함께 인생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오간다. 영화 도중에 성경 구절과 인물이 등장한다. 누가복음 17장 31에서 32절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미숙한 욕망 때문에 소금기둥이 된 롯에 대해 말하면서, 토미(안톤 옐친)가 겪은 삶의 역경에 찢어진 성경을 구겨 던지는 영화라고 표현하면 될까? 13살의 아이라면 겪을 ‘남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길목에서 좋아하는 여자 아이가 있다는 것이 그리도 미숙한 욕망이었을까?
단순히 사랑을 원했던 그의 선택들이었음에도, 그 ‘미숙함의 결과’라 칭해지는 것은 13살 아이의 인생이 견디기엔 터무니없을 정도로 무거운 참담함으로 이끈다. 인생을 쌓아가는데 꾸준한 노력을 해왔던 그에게 절망은 짧은 시간 내에 폭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곳곳에 존재하는 기억의 미장센들은 상실을 너무나 실감나게 만들었고, 물론 안톤 옐친의 열연이 가장 큰 몫을 한다. 앳된 얼굴에 생채기가 나고서 돌변하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가, 돌연 아이처럼 펑펑 우는 모습을 보면 와락 안아주고 싶어진다. 이 영화 역시 갑작스레 과거를 마주하기 위한 용기에 대한 설명이 부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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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The Talks | ||
부재함으로 우리는 해답을 얻지 못한 답답함과 먹먹함을 얻지만 이를 통해 문제 옆을 빗겨나가 있는 중요한 것을 보게 된다. 근거 없고, 계기가 존재하지 않으며, 과정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것. 혹자는 그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만, 한 단어로 축약하기에 이 불안한 존재는 아무 곳에 아무렇지 않게 퍼져있다. 여기서 안톤 옐친이 말한다,
“존재한다는 것의 두려움과 살아가면서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영화는 이 것을 함께 이야기하며 꿈 같은 존재들을 채워줘야 합니다. 진짜 해답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