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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 포레스트 2 : 겨울과 봄>, 2015 : 모리 준이치 作 / 하시모토 아이 | ||
1. 먹고 산다는 것
[디아티스트매거진 = 문희경] ‘먹는’ 행위는 ‘서러움’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필자 본인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근거한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 슬프거나 서러울 때 이것저것 많이 ‘먹게’ 되지 않던가. 특히나 한국어는 이러한 애상적인 감정 상황을 묘사할 때 ‘먹는’ 행위를 의미하는 표현들을 많이 쓴다. 가령― 속상한 마음, 차오르던 눈물, 그리움 따위를 ‘삼킨다’던가, 보고픈 얼굴을 ‘곱씹어’본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왜 그런지 곰곰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먹는다는 것(食)은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그림자처럼 인간의 뒤를 쫓아다니는 본능적인 ‘욕구(식욕)’의 발현이고, 그런 ‘본능’의 발현을 묘사하는 단어들을 슬픔, 그리움, 서러움, 후회 따위의 단어들과 이어붙인 표현들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네 삶의 운명론적 본질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이란 본래 마치 하루 세 끼 ‘밥 먹듯이’ 서글픔과 외로움을, 내 곁에 족적처럼 남기게 되어있다는. 인간에게 굴레처럼 주어진 숙명 말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는 게 세상살이의 이치’라는 식의 건방진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삶을 살다보면 생각보다 채 흘리지 못하고 ‘삼켜야만 하는’ 눈물이 많고, 내 뜻처럼 풀리지 않아 가슴을 쳐야하는 사랑이 많다는 사실을 마음 편히 인정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오만가지 상실과 슬픔들을, 나를 세상천지 유일한 불운아로 만드는 ‘특별한’ 불행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쯤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우리에겐 조금 필요할 수 있겠다는 생각. 즉, 특히나 태생적으로 낙관보다 비관에 가까운 사고회로를 가진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인식의 전환’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상처란 건 백신주사와 달라서 몇 번을 겪어도 매번 새롭게 아프고,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거다. 그러나 적어도 삶이란 게 본래 ‘자주 넘어지고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나면― 어느 순간 사람과 상황이 만든 상처를 성급하게 땜질하기위해 무턱대고 또 다른 타인에게 손을 내밀거나, 소모적인 자기연민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도 혼자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2. 엄마가 없는 ‘우리’집, 그리고 ‘나’의 집
결국 ‘이치코(하시모토 아이)’에게 농사짓고 밥해먹는 일이란 그렇게 넘어져 된통 깨져버린 무릎을 동여매고, 숨을 고르고, 다시 현실의 땅 위로 서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셈이다. 전작 ‘리틀 포레스트 1 : 여름과 가을’편을 다룬 글에서 필자는 그녀의 식탁 위에 오르는 모든 식재료들이 “그녀 자신의 ‘삶’을 밭 삼아 경작한 것들”이라고 쓴 적이 있다. 후속작인 ‘겨울과 봄’은 그러한 시(詩)적인 비유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좀 더 분명하게 보여준다. 가을이 지나도록 그 목적과 이유가 불투명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렸던 이치코의 귀농생활은 ‘겨울과 봄’편에서 좀 더 성숙해지고, 명확하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한다. 전작에서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끝내 답하기를 미뤄두었던―자신이 ‘코모리에 돌아와 머물고 있는 이유’에 대한 솔직한 성찰, 그리고 ‘엄마’와의 기억을 통해 ‘가족’의 의미에 대해 톺아보기까지 하는 그녀의 사유는 점차 ‘자신만의 것’으로 변해가는 레시피들을 통해 더 명확하게 그 변화가 느껴진다. 지난여름과 가을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부엌에서 엄마의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해 보며 집 나간 ‘엄마의 맛’을 재현해내는데 가장 큰 보람을 두었던 반면, 겨울을 나면서부터는 점점 ‘온전히 그녀 자신만의 맛’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가령, 빨간색과 녹색이 반반씩 나뉘어 있던, 엄마표 새하얀 ‘크리스마스 케이크’. 지난여름 엄마가 만들던 채소볶음의 맛을 찾아내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게, 그녀는 케이크 생지에 오로지 자신의 취향과 기호를 섞어 노란색과 보라색이 반씩 섞인 케이크를 만든다. 이렇듯 엄마의 레시피에 조금씩 자신의 ‘맛’을 넣어 변형해 보고, 마침내 ‘감자빵’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엄마의 맛을 재현해내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감자빵’맛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오로지 그녀만의 ‘맛’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것은 그녀가 이제야 정말 ‘제대로’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일종의 신호탄과도 같다.
전편에서의 이치코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회피하는 중이었기 때문일까, ‘실연’에 대한 언급 말고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그녀의 도시 생활에 대해서도 하나, 둘 에피소드가 드러난다. 관객은 이치코의 독백을 통해, 마치 군데군데 조각이 비어져있던 퍼즐판이 채워지듯 어딘가 석연찮았던 그녀의 귀향 이유를 수긍하게 된다. 정성과 진심의 가치가 고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농촌에서 자란 그녀에게는 낯설고 버거웠을 도시의 질서. 앞뒤 다르고, 사람보다 이윤이 중요시 되는 효율성과 경쟁의 땅에서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안정적으로 마음을 두고 살아갈만한 ‘집’을, 찾기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말 그대로 건축학적 용어로서의 ‘집(house)’이 아니라, 마음과 삶이 진득하게 머물러 살 수 있는 ‘집(home)’말이다.
그녀는 스스로가, 혹은 스스로의 상태가 ‘부끄럽다’고 했다. 이어지는 독백을 통해 스스로도 인정하듯, 이치코의 상경(上京)은 틀림없이 성급했고, 무방비했다. 떠나야 할 장소(엄마가 없는, ‘빈 집’)만 있었을 뿐, 떠남의 이유도 목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떠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에 쫓기듯 도시로 갔지만, 그곳에도 그녀가 찾던 ‘반겨주는 집’같은 건 없었다. 엄마와 이치코, 단 둘 뿐이었던 집에서 엄마가 사라진 후 어딘가 기이하게 일그러진 가족의 형태. 그녀는 어쩌면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든 메워야 할, 다급한 ‘실패’로 인식했던 것은 아닐까. 각자의 구성원이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하고 있고, 비록 새로이 찾아오는 사람은 없지만 늘 일상을 함께하는 가족이 있는 ‘우리 집’. 바로 그것을 되찾고 싶어 했던 마음이 그녀가 코모리를 떠나도록 떠밀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치코가 도시에서 만난 애인과의 이별 직후에, 그것을 구실삼아 코모리로 도피해온 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첫사랑이어서’, ‘실연당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텅 비고 구멍 난 집을 어떻게든 회복하려 했던 그녀 나름의 시도가 모두 수포로 돌아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연인과의 헤어짐이 수치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게 아니라, 그녀는 헤어짐의 과정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해야했을―혼자 남은 자신의 무력함이 그토록 부끄럽고, 창피했을 것이다.
3. 일곱 번째 요리 : 빈 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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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메워질 것 같지 않았던 엄마의 ‘구멍’은 ‘엄마’의 집을 버림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녀가 드디어 ‘엄마’를 ‘엄마’가 아니라, 한 사람의 ‘여자’, 혹은 ‘개인’으로서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치코가 코모리로 돌아온 뒤 살아왔던 ‘농부로서의 삶’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 엄마의 레시피, 엄마의 밭처럼 평생 ‘엄마’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집을 그녀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가꾸기 시작하면서, 또 평생을 변함없이 새벽부터 농사일을 돌보고, 가사노동을 하며, 동시에 육아도 해내면서 살아온 코모리의 어른들을 지켜보면서 어느 순간 이치코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대사처럼, 정말이지 “엄마에게 나는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었던 적이 있었을까.”하는 것을. 요컨대 엄마의 가출을 이해할 순 없어도, 엄마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겨우내 보관할 감자를 심기 위해 밭까지 갈아두었던 이치코는 ‘올해엔 감자를 심지 않겠다’는 결심을 곧바로 실천에 옮긴다. ‘제대로 돌아오기 위해’ 다시 코모리를 떠난 것이다. ‘제대로 돌아오기 위해’, 즉 ‘진짜 내가 머물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녀는 ‘엄마’의 집을 떠난다. 엄마의 레시피, 엄마가 일구던 밭, 엄마가 청소하던 집을 버리고 그녀는 그녀 자신의 레시피, 그녀의 밭, 그녀의 집을 찾기 위해 떠난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채우기 위한 떠남. 그동안 이치코는 각 계절마다 그 제철의 재료를 가지고 일곱 개씩의 요리를 만들어냈다. 여름의 레시피, 가을의 레시피, 겨울의 레시피 그리고 봄의 레시피. 그러나 그녀가 다시 코모리를 떠난 봄의 마지막 요리는 ‘빈 접시’다. 양파가 심긴 한 뙤기의 밭을 제외하곤 비어있는 그녀의 집처럼, 이치코의 요리책은 이제 흰 색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쳤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기에 그 맛을 알 수 없지만―적어도 앞으로 엄마의 맛과는 또 다른 ‘새로운 맛’들이 적혀갈 것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일곱 번째 접시는 텅 비어있으나 동시에 ‘풍성하다.’ 마지막 계절의 스물여덟 번째 요리이자, 새로운 계절의 첫 번째 접시인 셈이다.
4. 디저트 : 왜 사냐건 웃지요
“어차피 이치코는 금방 돌아올 것”이라던 ‘키코(마츠오카 마유)’의 말처럼, 그녀는 몇 년 뒤 다시 벚꽃 잎이 날리는 계절에 코모리로 ‘돌아온다.’ 또다시 도망쳐온 것일까. 그러나 이번엔 조금 다르다. 누군가와 ‘함께’ 왔다. 지난 봄 ‘주체적으로 내가 살 곳을 선택하기 위해’ 떠난다던 스스로의 말처럼 이치코는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 이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엄마 혹은 그 누군가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던 소녀. 또 서툰 방법 덕분에 쉬이 상처받아 도망치는가 하면, 그저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그렇게 방향 없이 흘러가는 자신의 삶을 위로했던 소녀는 이제 과연 자신만의 ‘맛’을 찾았을까?
조금 성급한 기대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딱 하나, 분명한 것은 있다. 그녀의 ‘춤사위’, 그러니까, 연락 끊긴 분교 동창들까지 모아가며 연습한 전통 춤 공연 말이다. 그 뜨겁게 떨리는 춤사위 속에 더 이상 숨기 위해 밭을 갈고, 외면하기 위해 밥을 짓던 소심한 소녀는 없다는 것. 이치코의 모든 동작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힘을 보라. 그것은 어느새 그녀가 코모리의 땅에서 짓고 다듬어 식탁에 올렸던 모든 식재료들의 생명력과 닮아있지 않는가?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실패와 구멍들을 “‘무엇’으로 채워야할지” 골몰했던 그녀에게서, 이제는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라는 물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적어도 그녀는 다시 스스로의 그림자 뒤로 숨지 않을 것 같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채울 것인가. 같은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도 조리법에 따라 그 맛이 완전히 달라지듯이, 삶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끝내 돌아오지 않은 엄마의 빈자리를 꼭 같은 것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는 것. 아니 애초에 삶이란 누군가가 내어 놓은 구멍들을 기우며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그 구멍들을 통해 혼자인 ‘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속부터 차오르는 배추처럼, 스스로 단단해지는 담금질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치코는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끝내 엄마는 돌아오지 않았지만―그 빈자리를 채울 새로운 가족과, 다시금 그녀의 손을 거쳐 식탁에 오를 작물들과, 그녀만의 레시피로 가득 채워질 새로운 부엌과 함께.●
남으로 창을 내겠오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오’(<문학>2호, 1934년 2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