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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존재하나요? 영화 <더블:달콤한 악몽(The Double)>(2013, 리처드 아요데)

   
▲ <더블:달콤한 악몽>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손정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언처럼 데카르트 존재론에서는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나 자신뿐이고 이는 불변의 진리다. 현대에 와서는 나 자신이 아닌 타인(혹은 사회)에게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됐다. 나의 존재가 타인에게 인식되길 아니, 어쩌면 인식을 넘어 각인되길 갈망한다. 마치 나라는 존재가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데카르트가 지금 존재론을 주장했다면, 일부는 구시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꼰대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최근 SNS상에서 일부 사람들이 자학 등 도가 넘는 행동을 공약으로 걸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 유명 대학 심리학 교수는 이들 행동의 원인이 나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해 보이면서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인정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이들을 아우르는 의미의 ‘관종’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관심 종자’의 줄임말로 타인의 관심을 받기 위해 비이성적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타인이 알아 줬으면 하는 욕구가 비정상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존재’는 그만큼 가깝고 중요한 문제이다.

   
▲ 사이먼과 제임스

<더블:달콤한 악몽>(이하 더블)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분신』을 원작으로 했다. 어느 날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사이먼 제임스(제시 아이젠버그) 앞에 분신 제임스 사이먼(제시 아이젠버그)이 나타난다. 분신은 외형은 똑같지만 사이먼과 정반대의 성격―사교적이고 외향적인 호감형의―을 가졌다. 제임스는 사이먼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사람들이 제임스를 주목하면서 사이먼의 미미한 존재감의 자리마저 그의 몫이 된다.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데 위기감을 느낀 사이먼은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더블은 분신이란 장치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다룬다.

영화의 많은 요소도 장치로써의 분신을 도와 존재를 다룬다. 나는 때때로 영상이나 대사에 몰입해 삽입곡을 못 듣는 경우가 있다. 영상이나 대사의 흡입력이 컸을 수도 있으나 음악이 큰 인상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블은 다르다. 서양인들이 잔뜩 등장하는 영화에 갑자기 일본 음악이라니. 일본 음악은 ‘내가 이 영화 OST다!’라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미장센으로서의 빛과 어둠도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조명만이 한정된 영역을 밝힌다. 빛 안에서만 그 존재가 뚜렷하고 당연히 시선은 밝은 곳을 향한다. 반대로 영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어둠, 그곳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 사이먼에게 제임스는 그림자이자 어둠이고, 자신을 잠식한다고 느꼈다. 마치 희미하게나마 비추던 핀 조명이 서서히 제임스를 비추기 위해 이동하는 것처럼. 나의 존재를 나밖에 모르는 어둠의 늪으로 사이먼은 가라앉고 있었다.

   
▲ 사이먼에게 자리를 비켜달라는 지하철 남자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인상적이다. 사이먼은 지하철에 눈을 감은 채 앉아 있다. 한 남자가 다가와 자신의 자리니 비켜달라고 말한다. 주위를 둘러보니 객차에는 사이먼과 앞에 서있는 남자 둘뿐이다. 단 한자리를 제외하고 모든 자리가 비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사이먼은 자리를 비켜준다. 남자는 그 자리에 앉아 ‘붕괴(Collapse)’라는 제목이 적힌 신문을 읽기 시작한다. 지하철의 자리는 누구의 것도 아닌 공공성을 띤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자리’라 말한다. 아마 그는 출근길에 항상 그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출근길의 나’라는 존재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출근길의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증명하는 것이 바로 그 자리인 셈이다. 만약 출근길에 다른 자리에 앉는다면 그는 늘 그래왔던 자신, 출근길의 내가 아니게 된다. 자신이 정한 ‘나’라는 존재에 괴리가 발생하면서 온전한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읽는 신문 속 ‘붕괴’는 ‘존재의 붕괴’를 암시한다.

사이먼도 지하철 남자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연회장에서 끌려 나갈 때 대령님과 마주치자 이렇게 외친다. “이건 제가 아니에요!” 분명 자신이 끌려 나가고 있으면서 이건 내가 아니라니. 사이먼은 존재감이 없을지언정 회사 구성원으로서 부정당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은 부정당하고 존경하는 대령님께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만다. ‘이건 제가 아니에요.’라는 말은 ‘저는 회사에 소속된 충실한 직원으로 그릇된 행동을 할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을 뿐이니 저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정도 될 것이다. 우리도 사이먼이나 지하철 남자와 다르지 않다. ‘원래 나는 안 그래’ ‘원래는 말랐는데 올 봄에 5kg 쪘어’ 이처럼 ‘원래’라는 말은 ‘최고(혹은 만족스러운) 상태의 나’로 나의 존재를 한정하고 정의 내린다. 다시 말해 불만족스러운 상태의 나는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는 셈이다.

   
▲ 영국 티저 포스터

사이먼과 제임스는 한사람이다. 사이먼이 자해를 하자 제임스에게도 똑같은 상처가 생긴다. 대령님 앞에서 당한 모욕으로 자신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해 새로운 내가 생겨난 것이다. 사이먼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다. 제임스에게 ‘진짜 나는 내 안에 없는 거 같아.’라고 고백한다.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이먼이 제임스도 사실은 나라는 걸 알리 만무하다. 사이먼은 점점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다 생각했고 불안했다. 한나(미아 와시코브스카)는 윗집 남자의 자살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길 바랐던 거 같아.’라고 말한다. 사이먼은 그에게서 자신의 최후를 봤을 것이다. 죽음보다는 잊히는 것에 대한 공포와 빼앗긴다는 착각이 사이먼을 광기로 몰아넣었다. 빼앗는 게 아니라 단지 다양한 ‘나’ 중에서 ‘사이먼이라는 나’가 ‘제임스라는 나’로 변해 가는 거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체성이 없는 ‘나’는 ‘나’와 싸웠고 누가 이겼든 결국 파멸은 ‘나’의 몫이 됐다.

그렇다면 존재에 대한 불안정과 위기의식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에 인더스트리얼 요소가 많은 것으로 보아 산업이 발달한 사회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는 개성을 지닌 존재보단 말을 잘 듣는 부품을 원한다. 사이먼의 회사에선 최고 결정권자를 사장이나 회장이 아닌 대령님이라 부른다. 군대식 직급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명령 하달과 절대 복종이 아닐까 싶다. 업무의 효율성을 높일 방안이 있음에도 사이먼에게 발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피드백보단 통보가 더 어울리는 사회의 단면이다. 문제점은 사이먼과 엄마가 함께 보는 회사 TV광고에서도 나타난다. ‘사람은 무한한 자원이다.’ ‘비즈니스가 사람이고 사람이 비즈니스다.’ ‘대령님은 당신이 가장 우수한 데이터 처리 시스템을 원하는 걸 알고 계신다.’ ‘특별한 사람은 없다. 그냥 사람뿐이다.’ 광고 속 멘트들은 인간을 경제적·산업적으로만 연관 짓는다.

   
▲ 사이먼을 대신해 한나와 만나는 제임스

현대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는 대체재에 불과하다. 이직을 예로 들면 나는 누군가의 자리를 채우고 또 누군가는 나의 자리를 채우는 일련의 과정에 불과하다. 꼭 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내 자리는 곧 모두의 자리기에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경쟁재와 대체재. 현대 사회에서 인간을 설명하기에 앞에 두 단어는 부족함이 없다. 두 단어에 쓰인 ‘재(財)’는 ‘사람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주는 모든 물건’을 의미한다. 인재(人才)는 현대 사회에서 인재(人財)로 변질됐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원으로서의 가치로 대치된 지 오래다. 워런티 카드는 제조업체에 당사 제품임을 증명하고 각종 혜택과 서비스를 받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신분증은 워런티 카드와 같다. 신분증을 제시할 때, 사회에서 나의 존재가 증명되고 각종 혜택과 복지를 받을 수 있다. 사회 체제와 효율적 관리라는 명목하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 물건이 됐다.

신분증을 잃어버린 사이먼은 한순간에 유령이 됐다. 출입구 관리 직원은 사이먼의 출입을 저지한다. 오랜 기간 회사를 다녔음에도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로 사이먼을 외부인 취급한다. 매번 외부인 방문증을 끊어야 했고, 동료들은 모두 그를 모른 척했다. 마찬가지로 인사과 직원도 신분증이 없는 사이먼을 회사 직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이먼과 인사과 직원의 대화 씬(Scene)은 가히 압권이라 그대로 옮겼다.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당신은 시스템에 없어요.” “그럼 복구시켜 주세요.” “그렇게 할 순 없어요.” “왜죠?” “당신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어요.” “하지만 전 존재했었는데요.” “그건 시스템에 따른 게 아니잖아요. 사실 시스템에 따르면 당신은 존재한 적도 없어요.” “시스템은 얼마나 믿을 만하죠?” “시스템은 완벽합니다.” “전 존재했었… 아니, 존재한다고요. 제가 여기 서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돌릴 수 있죠?” “카드가 필요해요.” “좋아요, 그럼 새 카드 주실래요?” “안돼요.” “왜요?” “당신은 시스템에 없으니까요.” “그게 다예요?” “그렇습니다.”

   
▲ 안개 속의 희미한 존재

나의 실재(實在)가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아이러니. 사회에서 나는 존재 자체로 증명되고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 나를 증명해주는 다른 무언가―신분증 같은―를 필요로 한다. 내가 부모님의 자식이고 동생의 형이며, 내 아이의 아버지임을 증명하기 위해선 가족관계증명서가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사회는 끔찍하게 폭력적이다. 시스템 내에 없거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의 존재를 부정한다.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생활지원대상자에게 매년 지원금이 나갔다는 뉴스처럼 시스템 안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 없는 사람도 있는 것이 된다. 이처럼 우리는 시스템 안에서 존재할 때 비로소 존재를 인정받는다. 실재보다 데이터로서의 존재가 더욱 중요해진 사회. 그곳이 사이먼의 세상이자 우리의 세상이다.

“자네 같은 사람은 없어. 그렇지 않나 사이먼?” “저도 제가 꽤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영화 엔딩에서 대령님과 완전히 망가진 사이먼이 주고받은 대화다. 대령님은 TV광고에서 특별한 사람은 없고 그냥 사람만 있을 뿐이라고 말했었다. 즉, 구급 차 안에 대령님은 사이먼이 만들어 낸 허구에 불과하다. 그저 지금의 자신이면 선망의 대상에게 이렇게 인정받으리라 상상한 것이다. 존재에 대한 갈증에서 비롯된 사이먼의 자기파괴적인 모습은 앞서 ‘관종’이라 불리는 이들과 놀랄 만큼 닮았다. 사회 시스템 내에서 나의 존재는 중요하다. 타인이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정체성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일본은 지진에 대비해 콘크리트 건물보다 목조 건물을 많이 짓는다. 이처럼 ‘나’라는 땅이 어떤 땅인지 알아야 그 위에 사회에서의 나, 타인에게 인식되는 나와 같은 건물을 튼튼하게 세울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차피 무너질 부실공사의 연속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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