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 매거진=서유진]
2일차. Puente la Reina~Ayegui (23.9km)
누군가한테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이 온 몸이 욱신거림을 느끼며 눈을 떴다. 순례자의 떠날 준비는 참으로 단순하다. 화장실로 가서 고양이세수를 하고 양치를 한 후, 아침거리가 있으면 먹고 없으면 먹지 않는다. 옷을 갈아입은 후 발바닥과 발가락 사이에 바세린을 듬뿍 발라준다. 물집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침낭을 돌돌 말아 배낭에 집어넣고, 등산화의 끈을 비장하게 동여맨 후 배낭을 메면 떠날 준비 완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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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례자들간의 인삿말인 Buen camino (직역하면 ‘좋은 길’이라는 뜻), 그리고 순례길의 상징 중 하나인 노란 화살표. | ||
순례자로 변신한지 이틀 만에 깨달은 사실은 화장은 사치라는 것. 첫 날 이것저것 꼼꼼하게도 발랐던 나는 눈썹만 겨우 그린 채 오늘의 목적지인 Ayegui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체력장을 한 것 마냥 온 몸이 삐걱대고, 어제보다 쉬운 코스임에도 훨씬 더 힘들게 느껴졌다. 오늘이 주현절인 탓에 만나는 마을마다 문을 연 가게들을 쉽게 찾아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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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을 걷다보면 흔히 만날 수 있는 낙서들. 꼭 지칠때쯤 나타나 힘을 주곤 했다. | ||
어제 미리 사두었던 빵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힘을 내어 걷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자판기에서 콜라 하나를 뽑아들고 무작정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쉬엄쉬엄 걸어 3시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역시나 고요한 이곳에 유일하게 문을 연 Bar에서 점심을 먹고, 속속 도착하는 순례자들과 이제는 꽤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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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현절 기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스페인 가정집의 모습. 주로 트리를 꾸미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주현절을 즐기는 현지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
주현절은 스페인에서 크리스마스보다 더 큰 명절이기에 아예 숙소가 문을 열지 않는 마을들도 많았고, 이 마을에서도 체육관을 개조한 알베르게 딱 한 곳만이 겨우 문을 열었다. 덕분에 어제 만났던 순례자들을 모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서 왔다던 순례자 아니코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글로 써진 ‘부다페스트’라는 글자를 보고 너무 예쁘다고 자신의 노트에 직접 써달라고 했다. 잠시 한글수업이 펼쳐졌고 모든 순례자들에게 한글로 이름을 써주었다. 그러다가 저녁을 먹으러 멕시코 순례자 엘사, 스페인 순례자 호세, 다비드, 조니와 밖으로 나갔는데 강남스타일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며 말 춤을 추었고, 낯선 땅에서 한국노래가 나옴에 조금 이상한 기분도 들었다. 다들 강남스타일 노래와 춤을 알고 있어서 신기했다. 특히 멕시코에서는 정말 인기가 많다고 했다.
낮에는 오지 않던 비가 내렸고, 낮에 점심을 먹었던 그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스페인어로 salud!, 한국어로 건배! 를 사이좋게 외치며 맥주도 마셨다. 마침 TV에서 레알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가 열리고, 마드리드 출신 조니와 바르셀로나 출신 다비드가 불꽃 튀는 신경전을 벌인다. 메시가 골을 넣는 장면을 보면서 즐겁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집이 크진 않은 것 같아서 바늘로 대충 터트리긴 했는데 살짝 불안하긴 하다. 나의 발은 원래 물집이 잘 잡히는 편인데다가 새로 산 등산화를 많이 길들이고 오지 못해서 조금 걱정이 된다. 끝까지 잘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된다. 그래도 마냥 좋다. 이 길 위에 서있는 내가 너무나도 마음에 든다. 오늘도 수고했어, Buen camin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