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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가득한 공간

[THE ARTIST 매거진=김영훈]

어린이에게 조용하고 차분하게 앉아있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선 ‘서예’를 가르쳤다. 또래 친구들은 바른 자세로 조용히, 그리고 오래도록 앉아 있어야하는 서예를 싫어했다. 그러나 나는 책상에 종이와 붓, 먹, 그리고 벼루가 가지런히 갖춰져 있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조용한 교실에 먹을 가는 소리와 함께 퍼지는 은은한 묵향이 좋았다. 그리고 당시엔 서예학원이 많았는데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서, 한문을 배우기 위해서,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 등 다양한 이유로 아이들은 서예를 배웠다. 서예를 배우며 자란 부모세대는 서예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안정과 위안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묵향 가득한 공간이 있다. 바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2014년 11월부터 약 1년 4개월간 공간개선을 위해 리모델링했다. 그리고 재개관 기념 전시로 <서書로 통일統一로-통일아!>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국내외 1만여 명의 서가(書家)와 명사의 서예작품이 최정화, 박기원, 서용선, 조민석(매스스터디스) 등의 작가에 의해 통일․평화를 주제로 재해석되어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통일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는 ‘망국(亡國):독립열망’ ‘분단(分斷):통일염원’ ‘통일(統一):세계평화’ 등 3가지 섹션으로 구성되어 있다.

‘망국’섹션에서는 <일자서(一字書)> 삼천오백 여 작품이 설치미술작가 박기원, 최정화에 의해 <Distant View>, <일자만다라>로 새롭게 탄생했다. 그리고 ‘분단’섹션에서는 역대 민족지도자 휘호와 남북분단의 실존을 그린 걸개그림, 그리고 현대서가들의 통일에 대한 생각을 담은 작품, <만상(卍想)>이 전시되어 있다.

   
▲박기원 <Distant View> 800 x 1700 x 900cm ⓒ김영훈
   
▲최정화 <일자만다라> 9mØ ⓒ김영훈

그리고 ‘통일’섹션에는 건축사무소 ‘매스스터디스’의 작품, <사해일가四海一家>가 설치되어 있다. 사해일가는 1508개의 서예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서예작품은 다양한 연령과 국적의 사람들이 ‘평화’, ‘통일’, ‘화합’, ‘미래’ 등과 연관된 한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 것으로 세대 간, 국가 간 경계 없는 평화와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천정과 바닥, 그리고 전시 공간 중앙의 기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서예작품들은 중앙의 기둥으로부터 전시장의 모서리를 향해 낮아지고 퍼져나가며 돔(dome) 형태를 이룬다. 또한 매달린 서예작품의 아래, 바닥에는 작가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1508개의 서예작품 모두의 가독성을 높이고 조형적으로도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었다. 또한 사해일가(온 세상이 한 가족이라는 뜻의 사자성어)라는 작품명과 어울리는 공간(Shelter)을 구축했다.

   
▲조민석 <사해일가> 1800 x 1800 x 350cm ⓒ김영훈

‘손글씨’가 귀한 시대다. 내 주변에서도 종이와 펜이 아닌 노트북과 태블릿으로 글을 쓰는 경우를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손으로 글을 쓰고 컴퓨터로 옮기는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하지만 나는 손으로 직접 글을 써야만 얻을 수 있는 ‘직관’이 있다고 믿는다. 또한 손과 펜이 종이를 스칠 때의 촉감과 파열음을 즐기고 빈종이가 글씨로 채워지는 것에 정서적 충만함을 느낀다.

서예는 문자의 조형미를 표현하는 예술이다. 문자를 반듯하게 쓰는 것만이 아니라 문자의 모양과 뜻을 이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서예에 대한 향수나 종이에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남다른 애착, 그리고 서예라는 장르가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었는지가 궁금한 사람이라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재개관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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