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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 레버넌트로 돌아온 자

   
▲ 영화 레버넌트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손정호][기사 내 모든 사진의 출처는 ‘NAVER 영화’입니다]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The Revenant)>(2015,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2월 29일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축하와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고 내게 묻는다면 주저 없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하 레오)라 말할 것이다. 그는 오스카상을 거머쥐기까지 4번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25년이란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레오에게 오스카상을 준 작품은 다름 아닌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이하 레버넌트)이다.

<레버넌트>는 정말 할 말이 많은 영화다. 앞서 말했듯이 오스카 남우주연상 수상 외에도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과 레오, 톰 하디의 만남으로도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영화만 놓고 보더라도 복수라는 소재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을, 촬영기법에선 알프레드 히치콕과 스탠리 큐브릭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수많은 연결고리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많이 떠오른 인물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이하 니체)다.

니체의 철학적 성격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신의 영역(이를테면 천국이나 극락)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영역인 ‘현실’만 실재한다는 것이다. 신의 영역이 없다는 것은 곧 신 또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유로 종교에 대한 부정이라는 논란이 항상 그의 뒤를 따랐다. 지금은 심도 있는 철학적 고찰보다는 수사적 표현을 배제하고 그가 저서에 언급한 표면적인 내용―예컨대, 신과 신의 죽음에 관한 스토리―을 영화와 연관 지어 말하고자 한다. 이 글에선 니체의 저서 「선악의 저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신을 종교적 존재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과 반대되는 완전하고 고결한 존재로 해석했음을 알리는 바이다.

   
▲ 광활한 자연 속에서 생존하는 글래스

<레버넌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각색한 스토리이다. 영화는 ‘아들’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제 생존 이야기에 복수라는 양념을 친 것이다.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생존은 생명 연장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복수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불가피한 요소일 뿐이다. 살고 싶다는 의지보다 죽이고 싶다는 의지가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래서 광활한 자연 환경 속에 글래스의 생존 과정은 경이롭다기보다 처절해 보였다.

악한 행동을 한 누구라도 벌로써 고통을 받을 수 있다지만 영화 속 약자의 고통엔 이유도, 신의 가호도 없었다. 영화 속 인디언은 무력에 있어서 백인에게 약자였으며 글래스의 아들은 피츠제럴드(톰 하디)에게 약자였다. 신은 약자의 편에 없었고 고통은 오롯이 약자의 몫이었다. 다만, 특이하게도 글래스는 자연 앞에서 적어도 약자는 아니었다. 그는 신이 누구의 편이든 상관없고 신에게 의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끈질기게 살아남고 더욱 독해질 뿐이었다. 영화는 그의 생존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그 생존의 원동력은 복수라 할 수 있다. 니체의 명언처럼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의 복수심이, 복수심에서 비롯된 끈질긴 생존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과거 회상에서 아들이 다쳤을 때 아들의 귀에 속삭인다. ‘절대 포기하지 말거라 숨이 붙어있는 한 끝까지 싸워야해.’ 자신의 말처럼 글래스는 자연과, 죽음과 끊임없이 싸웠고 끝까지 살아남았다. 인간은 언제나 죽음 앞에 약자라지만 글래스는 예외였다.

   
▲ 폐허가 된 성당 앞에 서있는 글래스

영화 속 인디언과 백인, 피츠제럴드와 글래스 모두 신을 언급한다. 피츠제럴드는 아버지의 일화를 통해 신을 이야기한다. 피츠제럴드의 아버지가 한참 굶주려 있을 때 눈앞에 신이 나타났다. 신은 다름 아닌 통통하게 살이 오른 다람쥐였고 그의 아버지는 다람쥐를 잡아먹었다.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버지가 신의 존재를 믿었다면, 독실한 믿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다람쥐를 신이라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람쥐를 신이 준 일용한 양식, 신의 구원이 아닌 신이라 표현하고 이어 그것을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는 이를 방증한다. 신은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다. 그들에겐 간절한 무엇이나 신이 될 수 있으나 신의 고결함과 영원불멸은 없었다. 신은 단지 그들에게 이로운 존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복수가 오직 삶의 이유가 된 글래스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복수 직전에 멈춘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 나타난 딸을 잃었던 인디언, 불현듯 떠오르는 은인인 인디언의 말. 글래스는 ‘복수는 신의 몫’이란 말을 중얼거리며 피츠제럴드를 그들이 있는 쪽으로 흘려보낸다. 이어 인디언은 글래스의 복수를 대신 해준다. 글래스의 복수는 다름 아닌 인디언의 몫이었다. 즉, 복수는 신의 몫이라는 말에 따르자면 그에게 신은 인디언인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디언에게도 자신의 딸을 구해준 글래스가 신이 된다. 결국 서로가 서로의 신이 되면서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 복수의 대상, 피츠제럴드

사실 복수는 신의 몫이라는 인디언의 말도 다르지 않다. 니체는 신이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졌기에 죽었다고 했다. 연민을 가졌기에 인간이 원하는 염원을 무시하지 못했으리라. 복수는 신의 몫이란 말 자체만 봐도 복수라는 불결한 행동을 가장 고결한 존재인 신에게 떠넘기고 있다. 문맥적으로 볼 때 신은 인간의 잘못을 벌한다는 의미보단 대신 행동을 옮기는 대리인의 의미에 가깝다. 고결한 존재가 불결한 행동을 했음에도 여전히 고결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는 곧 신에 대한 가치 훼손이자 우리가 신을 죽이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선악의 저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의 죽음은 추악한 자의 짓이다. 추악한 자는 용서란 모르고 앙갚음만을 생각하는 자였을 것이다. 곧 복수하는 자가 신을 죽이는 자가 된다.

니체에 따르면 최고 가치의 상실은 허무주의를 초래한다. 글래스에게 최고 가치는 아들이며 그의 죽음은 최고 가치의 상실이다. 최고 가치의 상실로 인한 새로운 가치의 대두, 그것이 복수일 것이다. 복수를 성공했지만 글래스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더 이상 살아갈 이유도 미련도 없는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불편한 마음만이 남았고 복수의 통쾌함은 없었다. 영화를 포함해 대다수의 문학·예술작품에선 복수극을 권선징악적 내용이라고 표현한다. 권선징악은 말 그대로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한다는 의미이다. 징악의 대가가 죽음이라면, 영화 속 무고한 사람들은 악이 아님에도 피츠제럴드와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결과를 맞이했다. <레버넌트>에선 좋고 나쁨,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니체는 반드시 좋은 것이 선을, 나쁜 것이 악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했다. 복수의 원인은 아들을 잃은 슬픔이지만 결과는 살해에 대한 살해이다. 복수라는 감정이나 행위는 나쁜 것이다. 하지만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아들을 잃고 복수하는 아버지를 악이라고 단정 짓기란 어렵다. <레버넌트>가 내게 던진 질문을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글래스는 악인가 악이 아닌가? 영화 속 신은 죽었을까? 죽었다면 신을 죽인 자는 글래스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곧 당신의 철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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