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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은 흘러갑니다 제 3 한강교 밑을 ― <강남 1970>,2015

[디아티스트매거진=김민아] *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곧 돈인 사회에서, 우리의 경쟁력은 종종 주어진 이 재화를 얼마나 요긴하게 쓰는가에 따라 판가름 나곤 한다. 종전의 원리대로라면 한 편의 영화를 관람하는 일 역시 가벼운 오락으로 치부하기만은 어렵다. 따라서 시간을 덧없이 소비하지 않으려는 똑똑한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기에 앞서 고려하는 일순위란 소위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름값’임에 분명하다. 그중에서도 감독의 이름과 전작은 주로 제목 앞에 붙어 작품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하는데, 만일 그 감독이 이른바 한국영화 르네상스라 불린 지난 세대에 회자될 만한 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비슷한 얼개로 구성된 장르 3부작의 야심찬 마지막 장을 들고 왔다면, 기실 해당 영화에 쏟아지는 기대치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강남 1970 티저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강남 1970>은 위의 의미에서 주목받아 마땅한 위치였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잇는 유하 감독의 ‘거리 3부작’ 마무리. 감독은 시대 앞에 무력했던 반항적인 청춘을 지나 폭력의 계단을 더 딛지 못하고 파멸하는 청년 건달을 거쳐 마침내 욕망의 소용돌이에 잠겨가는 비극적인 하류 인생을 스크린으로 끌고 들어온다. 3년마다 한 번씩 꾸준히 극장가를 두드린 친숙한 화자이니만큼 감독의 스타일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편. 그러니 돌연 새로울 까닭도 없건만, 언론을 비롯한 관객들의 시선이 한 데 몰렸던 것은 이 영화가 지난 2편의 괄목할 만한 작품의 종점에 있기 때문이었다. ‘욕망이 춤추는 땅’이라는 간결하고도 강렬한 카피 문구는 영화의 주제를 충실하게 대변하며, 포스터를 차지한 두 남자의 서슬 퍼런 기운은 어두운 조직 세계를 배경으로 등장할 일련의 사건에 대한 흥분을 한껏 고조시킨다. 완결판이라는 명함에 걸맞게 포진한 배우들도 훌륭하다. 정리하자면 이 영화, 관람 전부터 값을 넉넉히 쳐줄 수밖에 없는 명실상부 기대작인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유리한 고지에서 출발한다 해도 경기 중 선수의 진가가 올곧게 발휘되지 않으면 만족스러운 기록 또한 거둘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러닝 타임 내내 건달부터 정치인까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땅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작 이러한 욕망은 집약되어 폭발하지 않고 그저 산발적으로 이어져 피로감을 유발시킨다.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조직의 세력 다툼 안에 긴장이나 치열함은 도사리지 않으며 인물들은 단지 땅문서를 얻기 위해 반대 집단을 습격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실제로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졌던 남서울 개발계획에서 모티브를 얻은 소재 자체는 결코 요리하기 나쁘지 않은 재료였다. 하지만 기존 느와르의 오마주로 보이는 특정 시퀀스와 장르의 특성상 얼마든지 짐작 가능한 (그래서 진부한) 여러 장면들은, 단순히 병렬 구조로 나열되었을 뿐 주제 의식을 관통하거나 유기체로 묶여 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 강남 1970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반전을 꾀하지 않아도 흥미로운 전개가 가능하다는 것은 세기에 걸친 영화 역사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그러나 <강남 1970>은 마치 링 위에서 잽밖에 날릴 줄 모르는 초보자처럼 거듭 반복된 기술만을 사용한다. 서로 대적 관계인 두 조직은 쉼 없이 상대의 뒤통수를 날리고, 패자는 죽어 사라지며, 자리에 올라선 새로운 인물은 전자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암투에 휘말려 죽임을 당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종대(이민호 배우)와 용기(김래원 배우)의 고군분투는 다음에 올 배신을 위한 초석 정도로만 쓰이는데, 영화가 인물들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소비하고 버리는 탓에 두 남자의 캐릭터가 효과적으로 살아나지 못함은 물론이요, 동시에 추억 혹은 가족애처럼 가슴을 울려야 할 감상들은 종대의 행동을 정당화시키는 장치로써만 기능하게 되었다. 극의 호흡과 감정선은 등한시한 채 오직 기승전결의 완성만을 중시하는 듯한 진행 태도는 다 짜놓은 대국을 보고 판 위에 그대로 옮기는 바둑처럼 지루하기만 하다. 누구도 한 가지 기술만 주고받는 게임을 보러 돈을 지불하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 강남 1970 스틸컷 (네이버 영화 포토)

연출의 흐름마저 길을 잃고 부산스럽다. 유하 감독의 전작들이 호평을 받았던 이유는 관객에게 주인공 현수(<말죽거리 잔혹사>)와 병두(<비열한 거리>)를 따라갈 수 있는 단서들을 충분히 남겨주었기 때문이었다. 폭력이란 두 음절에 굴복하는 초반부를 지나면 인물들은 서서히 그 글자가 지닌 힘을 갈망하고 휘두를 줄 알게 되며, 갈수록 날카로워진 무기는 후반부에 도착하면 예외 없이 주인공 자신을 겨누어 찌르고 만다. <강남 1970> 또한 이 설계안을 따르는 듯 보이나 그 안에 현수 같은 고뇌나 병두가 가졌던 울분 등은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종대를 싸움판으로 걸어가게 하는 계기들은 하나같이 지극히 상투적이며 그마저도 몰입의 여지를 주지 않아 머리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 부지기수다. 심지어 두 번째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용기란 인물은 행위의 정당성조차 부여받지 못하는 프레임이 너무 많아 당황스럽다. 움켜쥔 권력을 놓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그의 몸부림은 극 전반에 살아 숨 쉬지 못하고 감독이 깔아놓은 철로를 달리기에 바쁠 따름이다.

기실 이 무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캐릭터들은 욕망의 주체라기보다 감독이 각 길목마다 배치한 설치물처럼 보인다. 그나마 가장 입체적 양상을 띠는 주인공 종대도 대부분의 경우 운명적 아이러니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데, 극을 짊어지고 가는 두 명마저 흐릿한 마당에 조직과의 알력 다툼, 천민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정치 공작, 엇갈린 사랑까지 저마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쏟아지기만 하니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혼란스러운 것이다. 도대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근본적인 물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 연이은 혈투극과 수위 높은 베드신까지 접하고 나면 관객의 머릿속은 일약 진공 상태가 된다. (피투성이 화면에 눈이 피곤해질 즈음 어김없이 삽입되는 남녀의 섹스는 누굴 위한 유흥인지 알 도리가 없다.) 무려 일주일을 촬영했다는 진흙탕 난투는 인상적인 볼거리이긴 하나, 워낙 자극적인 액션이 잦아 감흥이 적다. 판을 흔들기엔 다소 모자란 한 수. 결론적으로 ‘유하’표 느와르가 거둔 유종의 미는 썩 그럴듯하다고 볼 수 없다. 장르물에 따른다는 클리셰만으로 영화가 안은 한계를 덮기에는 지난 수십 년간 너무도 훌륭한 작품들이 줄지어 우리 곁을 찾아오지 않았던가.
 

   
ⓒ 강남 1970 스틸컷 (공식 홈페이지)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배우들 연기를 감상하는 맛 또한 미지근하다. 극을 받치는 축대인 이민호와 김래원은 나름대로 호연했지만 과연 ‘종대’와 ‘용기’라는 옷이 그들 몸에 꼭 맞았는지는 미지수이다. 특히 아쉬운 이는 용기 역의 배우 김래원인데, 그는 꽤 발군의 실력으로 이야기 곳곳을 누비고 다녔으나 서사의 초점이 종대에게 맞춰진 탓에 매순간 빛을 발하지 못하고 쓰러져야 했다. 정감 가는 주인공만큼이나 탐나는 타이틀이 파괴적인 악역이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통해 각각의 주인공에게 배우로서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했던 점을 고려했을 때 <강남 1970>이 보여준 인물 활용법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걸리는 손톱의 가시 같은 대목이다. 또한 다양한 작품에서 연기력을 검증받은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작품치곤 보는 재미가 알차지도 않다. 적과 적이 대면하는 구도에서조차 인물간 충돌이나 힘겨루기에 집중하지 않고 벌어지는 사건(주로 투기와 모략, 배신에 근거하는)을 전달하기에 급급한 화술은 슬프게도 그들 연기를 구경할 기회는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애정 관계를 그리는 붓놀림은 또 어떠한가. 조직이란 피라미드가 남성 위주로 구축되었다고는 해도 <강남 1970> 속 여인들은 소모품에 가까울 만큼 수동적으로 쓰인다. 그나마 복부인인 민 여사가 싸움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그녀도 결국 관습적 체제에 기생하는 끄나풀에 불과하다. 주인공들의 사랑은 거친 터치로 일필휘지한 것이 아니라 엉성하게 그리다 만 수준이다. 케케묵은 연애 감정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다. 공식은 진부하더라도 이를 납득시킬 수만 있다면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는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강남 1970>에는 육체적 접촉은 있지만 마음의 동화가 없다. 이래서야 건달의 순정도 피비린내 나는 뒷골목에 사장되어 뒹구는 수밖에.

135분은 관객이 견디기에 만만한 시간이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이렇게 긴 이야기를 풀어낼 작정이었다면 보다 철저한 연출로 서사 곳곳을 예리하게 재단했어야 옳다. 서두에 쓴 표현대로, 이 영화가 거리 3부작의 화려한 대미를 장식하고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해내기엔 전작 대비 아쉬움이 짙어 보인다. 우리 삶의 욕망은 얼마든지 홀로 생겨났다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욕망은 아니다. 일단 씨앗을 틔웠다면 자라나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든 가지를 뻗어 그 열매를 맺어야 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흘러나오는 혜은이의 ‘제 3 한강교’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강물은 흘러갑니다 제 3 한강교 밑을…… 과연 유하 감독의 야심은 춤추는 욕망을 싣고 제3 한강교를 점령할 것인가. 혹은 글자 고스란히 ‘흘러가기만’ 할 것인가. 쾌감보다는 쓴맛이 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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