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박수인]리움미술관 상설전시는 우리나라 고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1관, 동서양의 현대미술을 전시하고 있는 2관으로 나뉘어져있다. ‘자코메티, 로스코의 작품과 불화의 조우는 고미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며 예술에 내재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라는 구절과 함께 1관의 전시는 시작된다. 실제로 2층 불교 및 금속공예 관에서 우리는 여러 불상과 함께 자코메티의 조각과 로스코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작품만으로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표현하기란 아쉬움이 남는다. 기원전 2만 년 전 인류가 알타미라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미술은 이미 시공과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나는 1관과 2관을 갈라놓는 무자비한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사진촬영은 불가하고 모든 사진의 출처는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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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도자기와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유리를 액자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고려시대, 조선시대의 청자와 백자를 보고 이 병들은 어디에 쓰였던 거지? 와 같은 의문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하자. 이제 이 도자기를 그림 그 자체로 봐도 좋고, 하나의 캔버스로 봐도 무방하다. 백자 [분청사기조화 선조문 편병]을 보면 둥그렇고 납작한 화분에 낙서한 듯이 긁어놓은 마구잡이 선들이 보인다. 2관에 있는 바스키아의 작품 [무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캔버스에 글자, 사람과 함께 의미 없는 선들을 볼 수 있다. 바스키아가 그린 선은 추상화의 선이고, 백자의 선은 대나무를 형상화한 선이라는 확신에 바스키아의 선이 대나무일 수는 없을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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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관의 추사 김정희의 서예 [예서 대련 ‘호고유시’]는 7자가 세로로 2줄 씩 14개의 한자가 쓰여 있다. 서예란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을 뜻한다. 글자 한 획을 그을 때의 시간, 붓을 쥐는 손의 힘에 따라 그려지는 선은 천차만별의 모양으로 나타난다. 최근의 미술은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 다양한 매체들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중에서 문자를 수용하고자 한 것이 바로 2관에 있는 리처드 프린스의 [무제 좋은 소식, 나쁜 소식]이라는 작품이다. 액자 속에는 파란바탕에 노란색 글씨로 6줄의 영어가 쓰여 있다. 판화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그림과 똑같이 100장이고 200장이고 찍어낼 수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보고 ‘완전히 새로운 예술은 없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두 작품의 닮은 점, 다른 점을 비교하게 만들고 어느 것이 더 훌륭한 작품인지의 우위를 정하는 오류를 야기한다. 붓과 먹을 통해 느끼는 강렬함이 있다면, 판화를 통해 느끼는 명쾌함이 있다. 우리는 각 작품 앞에서 우리 안의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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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안중식의 [풍림정거도]와 스기모토 히로시의 [번개치는 들판]을 보자. 번개가 흐트러지는 모습들은 대산맥과 큰 뿌리에서 흩어지는 수없이 많은 작은 산들을 위성사진으로 찍어, 선으로 이어놓은 모습처럼 보인다. 그래서 더욱 더 풍림정거도의 뾰족 뾰족 모난 산자락들의 형상과 겹친다. 예술을 정의하고자 하는 자들은 현대 미술과 함께 현대시, 현대소설 앞에 붙은 ‘현대’는 흥미로움을 뜻한다고 한다. 이렇게 구분 된 정의는 현대 이전의 미술 또한 흥미 즉 유희를 기반으로 발전해왔음을 간과하게 만든다. 알타미라의 벽화를 보고 느낀 흥미는 동굴 벽에서, 종이, 캔버스 그리고 TV로 더 나아가서 전시관 안의 벽, 박물관의 외벽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미술은 현재를 사는 인류만의 우월의식의 상징이 아니다. 흥미는 새로운 것, 참신한 것을 마주했을 때 생기는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두 그림에서 흥미를 느끼듯, 조선 시대의 사람들 또한 저런 뾰족한 산자락을 보고 흥미를 느꼈을 것이며, 또한 스기모토의 번개에도 박수 쳐 줄 안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한계는 그저 물리적 시간을 이기지 못했음 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