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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 섭은낭> 국내 포스터 | ||
[디아티스트 매거진=박동수]
-스포일러 포함
드디어 만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치열한 예매경쟁 속에서 아쉽게 티켓을 놓치고, 개봉 전에 있었던 두세 차례의 시사회와 상영회엔 일정이 맞지 못해 모두 불참했다. 운 좋게도 감독님의 마스터 클래스에 초대받아서 다녀왔지만, 아직 영화를 보기 전이라 그런지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큰 기대감을 품고 기다린 영화가 바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이다. 사실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허우 샤오시엔이라는 이름 때문이다. 영화 전공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유일하게 딱 하나 있는 영화관련 전공수업을 들을 때 여러 번 등장했던 이름이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는 <자객 섭은낭>까지 겨우 3편을 봤지만, 전공서적에서 보던 이름이 신작을 내놓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관심이 생겼다. 또한 정적이고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무협 장르를 시도했다는 점이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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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 섭은낭> 스틸컷 속 섭은낭(서기 | ||
<자객 섭은낭>의 서사구조는 전형적인 무협영화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정치적 이유로 여도사에게 맡겨진 섭은낭(서기)는 최고의 자객으로 길러진다. 어느 날, 암살 임무를 수행하던 은낭은 암살의 대상이 아이를 안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본다. 측은지심에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은낭을 여도사가 꾸짖는다. 여도사는 능력은 최고이지만, 자객으로써 갖춰야할 마음가짐을 위해 은낭에게 새로운 임무를 준다. 고향인 위박으로 돌아가, 어릴 때 연정을 품었던 위박의 절도사 전계안(장첸)을 암살하라는 것이다. 임무를 위해 위박으로 향한 은낭은 갈등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굉장히 느린 호흡으로 진행된다. 그러면서도 109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위의 이야기를 전부 넣기 위해 생략된 부분이 많다. 가령, 섭은낭이 최고의 자객이 되는 수련과정 등이 영화에는 생략되어 있다. 또한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롱테이크로 진행된다. 전계안과 그의 아내 호희(사흔영)가 대화하는 장면, 섭은낭이 산 위의 여도사를 만나는 장면 등이 롱테이크 담겨있다. 심지어 섭은낭의 목욕물이 준비되는 과정마자 2분여 정도의 롱테이크로 화면에 담긴다. 이러한 롱테이크는 영화의 느린 호흡을 만들어줌과 동시에 서사보다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에 집중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자객 섭은낭>은 서사 자체로 관객들의 흥미를 끌고 오락을 제공하는 영화가 아니다. 서사 대신 미술과 촬영, 연기가 만들어내는 영상 자체에 그 목적이 있다. 영화의 감정은 영상 그 자체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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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 섭은낭> 스틸컷 속 전계안(장첸) | ||
그래서일까, <자객 섭은낭>의 액션들은 독특하다. 홍콩과 중국에서 만들어지던 화려한 무술들 대신, 일본 사무라이 영화들을 보는 듯한 리얼한 액션들이 등장한다.(허우 샤오시엔 감독이 직접 일본 사무라이 무협 영화들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예를 들자면, 기존의 무협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중력을 거스르는 경공술은 살짝 과장된 파쿠르 액션처럼 묘사된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은 무술팀에게 중력의 존재를 잊지 말라는 당부를 반복해서 했다고 한다. 또한 섭은낭의 검술이 당대 최고임을 나타내기 위해 합을 오랫동안 주고받는 대신 빠르게 결판이 난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특유의 리얼리즘이 이렇게 무협 액션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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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 섭은낭> 스틸컷 | ||
<자객 섭은낭>의 영상 속 감정은 특히 섭은낭의 액션을 통해 잘 드러난다. 본래 자객은 암살을 목적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암살이라는 것은 가해자가 정체를 들키지 않고 목표를 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영화 속에서 섭은낭이 암살에 성공하는 대상은 흑백으로 처리된 오프닝 시퀀스에서 뿐이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섭은낭은 말에 탄 목표를 살해한다. 풀숲에서 튀어나와 목표의 목을 긋고 사라진다. 등장과 공격, 퇴장이 한 합에 이루어진다. ‘자객의 본업은 이런 것이다’라고 보여주는 듯한 프롤로그이다. 이후 섭은낭은 두 번의 임무를 모두 실패한다. 특히 지붕 위에서 전계안과 대결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라는 듯이 그의 칼을 피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는 자객의 기본 상식을 거스르는 행동이다. 하지만 섭은낭은 그 상식을 거스른다. 그녀의 복잡 미묘한 감정상태가 춤을 추는 듯한 액션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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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객 섭은낭> 스틸컷 | ||
액션 외에도 누구의 시점인지 불명확한 시점숏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을 나타낸다. 극 중 전계안과 호희가 대화하는 장면은 누군가 비단 장막 뒤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으로 촬영되었다. 때때로 비단을 들추고 그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섭은낭의 시점이라기엔 시점의 위치가 너무 개방되어 있다. 몰래 지켜본다기엔 너무나도 잘 보이는 위치에서의 시선이다. 사실 그 시점의 주체가 섭은낭인지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드러나는 감정은 섭은낭의 감정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반투명한 비단 천에 가려졌다 선명히 드러나길 반복하는 전계안의 모습은 섭은낭이 아직 떨쳐내지 못한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의 마지막, 섭은낭은 여도사에게 결국 임무에 실패했다고 전하러 간다. 안개가 피어오르는(CG가 아닌 실제 안개이다!) 산에서 여도사를 대면한 섭은낭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할 임무에 실패하고 끝내 온전한 자객이 되지 못한다. 때문에 섭은낭이 신라로 떠나는 장면을 담은 롱테이크, 강렬하고 빠른 음악과 함께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은 진한 여운을 준다. 섭은낭의 마음은 정리된 것일까? 아니면 임무처럼 마음을 가다듬는 데 실패한 것일까? 가능성은 낮지만 혹시 모를 속편을 기대해보며 섭은낭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