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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형제와 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뷰티풀 라이(The good lie)’, 2015, 필리프 팔라도 감독 / 아놀드 오셍, 게르 두아니, 엠마뉴엘 잘, 리즈 위더스푼
   
▲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서 있는데 강 이편 언덕에 서 있는 이와 저 편에 있는 이는 둘 다 그의 형제라. 하나는 형, 하나는 동생이라. 그 중에 하나가 모시옷을 입은 자 강물 위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고난이 언제야 끝나나이까?’ 그가 말하길 ‘다니엘아, 가거라’ ‘이 말씀은 마지막 날까지 은밀하게 간직될 것이다’ ” -다니엘서 12장, 6 – 10절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스틸컷)

“ 이것은 나의 형제와 누이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제 3세계. 테러. 내전. 가난. 기아. 조혼 풍습. 에이즈. 그리고 낮은 교육수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 편식하던 어린 시절, ‘얘야 이것도 못 먹어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세상에는 많다.’던 어른들의 이야기. 불쌍한 그 아이들에 비하면 나는 복 받은 것이니까 밥은 남기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일까 자라나며 한 때 지구는 매년 산타의 선물을 받는 아이들과 받지 못하는 아이들, 두 부류로 나뉘어 사는 흑백의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한 연민과 얕은 경멸을 아슬아슬하게 줄 타던 감정―, (그 복을 누가 내리는 것인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어쨌거나 복 받은 나와, 박복하게 태어났기에 가난하게 산다는 그 아이들 사이에는 딱 그만큼의 철벽이 존재했다. 불쌍한 건 불쌍한 거고, 여전히 나는 편식했고, 밥을 남겼으며, 학년이 올라가도 얻어 온 옷을 입어야하는 게 싫었다.

 헌데 굳이 아프리카까지 가지 않아도 밥 굶고 떨어진 옷을 입는 아이들은 세상에 예삿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배운 뒤부터, 명확하게 갈려있는 줄 알았던 흑과 백 사이에 그 둘을 이어붙이는 회색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백의 나라에 살던 어린이도 어느 날 갑작스럽게 흑의 나라로 떠밀려갈 수 있다는 진실. 테오와 마메르, 아비탈, 다니엘과 폴, 예레미아가 수단에서부터 케냐 카쿠마 난민캠프까지 걸었던 만여 킬로의 땅은 바로 그렇게 흑과 백의 허리를 이어붙이는 회색지대였다. 희망과 절망의 사이, 죽음과 생존 그 중간에 있는 회색지대. 결국 제3세계 아동들의 존재가 새삼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영토상의 거리 때문이라기보다, 우리가 그들의 자세한 앞뒤사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일 거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은 그렇게, 헐린 천막에서 영양식을 원조 받지 않고서는 자립할 능력이 없는 무력하고 불쌍한 존재로 태어난 것처럼. <뷰티풀 라이>는 그것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그렇기에 삶이 발붙일 최소한의 땅마저 빼앗긴 극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걷는(혹은 걸어야만 하는) 아프리카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오늘날 세계 난민의 실상을 이루는 가난과 무력함, 연민 너머에 어떤 필사적인 노력들이 존재하는지 보여줌으로써, 결국 이것은 특정 종교나 인종, 국가를 넘어선 보편적인 인간의 ‘생존’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주목한다. 따라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여닫는 예레미아의 내레이션처럼, 이들의 이야기는 아프리카만의 동화가 아니라 인류라는 이름으로 묶인 ‘나와 내 형제, 누이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 Just do it : 기적은 작은 용기에서 시작된다 ”

 만 킬로를 걸어 들어간 카쿠마 난민캠프에서 13년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마메르와 형제들은 미국 땅을 밟지만, 어쩐지 녹록치 않다. 도착한 공항에서부터 위탁가정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누이인 아비탈과 헤어지게 되고, 직업 중개사 ‘캐리’(리즈 위더스푼)의 고군분투에도 초원에서 소 치던 마메르족(族)의 자본주의 입성은 험난하기만 하다. 아프리카 땅에서 배운 지나친 격식체의 영어부터, 그럴싸한 자기포장을 하지 못해 번번이 떨어지는 면접까지. 걸으면 걷는 만큼 목표지점에 데려다주고, 한 덩이의 밥을 두고도 여럿이 나누는 기쁨을 가르쳐주었던 아프리카와는 다르게, 수많은 관료시스템과 절차, 처세로 점철된 미국땅은 이들에게 마치 넘기 힘든 파도 같은 위압감을 과시한다.

 점차 늘어가야만 하는 ‘선의의’ 거짓말들 속에서 마메르, 폴, 예레미아는 ‘세상에 착한 거짓말이 어디 있나요?’라고 묻는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거짓말들이 있다’는 세상의 대답에 문득,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사이에 애써 외면해왔던 해묵은 금이 들춰지고 만다. 13년 전 생사를 가르던 사하라 횡단길에서, 병마와 굶주림 등으로 잃어야만 했던 수많은 형제와 친구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족장이었던 ‘테오’의 실종에 관한, 폴과 마메르의 오랜 갈등이 마침내 터진 것이다.

 13년 전, 아픈 막내 다니엘을 위해 쉬어가자던 마메르의 주장에 야영했던 수풀에서 군인들에게 동생들이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족장이자 연장자였던 테오는 스스로 인질이 되어 붙잡혀 간다. 군인에게 붙잡혀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았던 마메르는 자신이 형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남은 아이들만큼은 반드시 케냐까지 이끌고 가야한다는 책임감으로 그 날 이후 13년이 흐른 시점까지 족장, 곧 가장의 역할을 책임져 온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친구들의 희생 속에서 테오를 유독 따랐던 폴은 ‘쉬어가자’던 마메르의 한 마디가 테오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이렇게 시작된 둘 사이의 삐걱거림은 긴 세월 침묵 속의 지뢰처럼 자랐다. 시급했던 생존의 문제 앞에서 그 날 일의 잘잘못까지 따지기에는 모두가 어렸고, 두려웠던 것이다. ‘테오의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자기위로 속에서, 조금씩 혹처럼 자라난 마메르의 열등감과 폴의 불만은 마침내 작은 사건 하나로 터지게 된다. ‘단 한 번도 형을 족장으로 생각해본 적 없다’고 외치는 폴의 고백을 계기로, 마메르는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힘겹게 움켜쥐어온 ‘족장’이라는 이름의 실체가 실은 사라진 테오로 인한 죄책감과 열등감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외면해왔던 갈등을 마주볼 용기가 생겼다면 낡고 다친 관계일지라도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 수 있다. 그러려면 갈등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픈 기억을 마주할 때 사람은 가장 나약해진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 대한 용서와 사랑은 바로 그 나약함에서 나온다. “폴, 나는 네 족장이 아니라 단지 네 형이고 싶어. 미안해”라는 마메르의 사과가 따뜻하게 울리는 것은 그 작지만 어려운, 그의 용기가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진짜 기적은 테오와 다시 만났다는 사실, 그 것이 아니다. 만 킬로미터의 목숨 건 여정도 묶어주지 못했던 폴과 마메르가 진짜 형제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화해가 진정한 가족을 만들었다는 것. 이들이 이룬 기적은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의 용서였다.

“…우리의 차이가 우릴 갈라놓을지라도

공동의 인류애가 우릴 묶어줍니다

우린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집이란 이름의 낙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릴 수단의 잃어버린 아이들이라고 하지만

우린 잃어버린 존재들이 아니라 발견된 존재들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예레미아의 축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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