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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소멸

   
▲ Untitled(Bed) 1991 출처=https://www.moma.org

[디아티스트매거진=황희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쿠바 출신의 아티스트로 시계, 사탕 등 기성품을 활용하여 은유적이고 시적인 작업을 한다. 그는 제 3세계 태생의 동성애자였고, 연인 로스와 그 모두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의 작업은 대부분 연인인 ‘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Untitled(Bed) 1991’ 흐트러진 이불과 베개 사진은 그와 로스의 일상을 그대로 옮겨 담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마치 연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침대를 영원히 붙잡아 두려는 듯 한 그의 시선은 사랑스럽다 못해 애절한 감정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이처럼 토레스의 작업은 연인에 대한 사랑을 나즈막히 고백하듯 함께 했던 시간 속에 유효한 감정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 Portrait of Ross 1991 출처=http://shape-and-colour.com

이토록 사랑하는 연인이었던 로스가 에이즈로 사망한 후, 토레스는 로스를 추억하기 위한 작업을 한다. ‘Portrait of Ross 1991’ 관람객들은 79kg 만큼 쌓여 있는 사탕을 원하는 대로 가져갈 수 있고, 사탕이 전부 바닥나면 사탕은 계속해서 79kg만큼 쌓인다. 이 무게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몸이 쇠약해진 로스의 정상체중을 의미한다. 이 세계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연인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사라져가는 사탕과 대비되지만 격정적이고 극단적인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사라지는 그 순간 순간을 꾹꾹 눌러 담아 응시할 뿐이다. 그의 작업은 끊임없이 소멸하는 과정,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한다.

흔히 미술은 공간과 시간 그 어느 곳에도 제약받지 않는 예술이라고 한다. 공연의 경우, 그 장소와 시간 마다 다른 공연이 나오고, 음악 역시 매번 같은 곡을 연주하더라도 결코 똑같을 수 없다. 하지만 미술은 작품이 가지는 절대적인 의미, 그리고 불변성이라는 영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장소와 시간에 큰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공간과 시간보다는 복제에 의한 원본의 불변적 가치가 와해될 정도니까.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미술품이 가지는 불변의 진리는 그 힘을 잃게 된다. 이제 작품 자체가 가지는 영원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관람자에 의해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장소에 따라 배열이 달라지기에 작품의 고정된 형태도 없을뿐더러, 좌대 위에 전시되는 것이 아니기에 관람객들은 ‘화이트 큐브의 예술품’이 가지는 위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제 작품은 전시가치로서만 존재했던 유물의 한계를 벗어나, 감각으로 체화하여 실재하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미술은 자신의 공간적, 시간적 우위를 내려놓는 동시에 관람자를 작품에 개입시키는 능동적 특성을 획득한다.

토레스의 작업도 마찬가지이다. 고정된 형태를 관람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관람자를 개입시켜 ‘소멸’이라는 과정을 직접 인지하도록 한다. 그의 작업 역시 완벽한 형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기에, 어느 공간에서든, 어떤 시간에서든 고정된 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시공간의 권위에서 벗어났을지 몰라도, 관람자들에게 종속된 시간은 작품의 급진적인 변화와는 다른 지점에 서있다고 할 수 있다.

2012년 6월 플라토 미술관에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전시가 열렸다. 당시 플라토 미술관을 찾았던 사람들은 로스의 소멸에 일조(?)하며 토레스의 작업을 완성시켜 나갔다. 하지만 그 장소에 없었던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기록으로만 남아버린 그 순간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미술이 과연 모든 제약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그의 작업은 소멸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에, 작품 자체의 영원함이라는 속성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토레스의 작품은 소멸하고 있지만 그의 작업은 영원히 존재한다. 작품의 외적인 형태는 시간과 장소라는 고정된 진리로부터 벗어났지만 결국 작가의 개념은 평생토록 남아 언제든 다시 구현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작품이기에 절대 버릴 수 없는, 작품으로 탄생함과 동시에 부여되는 고유성이다. 그 고유성에는 관람자의 개입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작품을 접한 ‘그 시간, 그 곳’의 관람자들에게만 유효한 결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라는 공간에 ‘2012년 6월-9월’이라는 일정 시간 동안만 존재했던 토레스의 전시는 소멸해가는 그의 작업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사라져가는 것들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전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형태적으로 계속 사라진다. 게다가 ‘전시’라는 일시적인 이벤트로 인해 사라져 버린 그의 작품들은 그가 이야기하는 ‘소멸’의 거시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관람자가 가진 시간적 제약으로 인해 소멸해버린 토레스의 플라토 전시는 어쩌면 토레스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소멸’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만약 토레스의 전시가 그 장소에서 평생 진행되고 있다면, 작품 자체는 계속해서 소멸할 테지만 매 순간의 관람자들은 영원히 되풀이 되는 작업을 보게 된다. 사라짐을 이야기하는 그의 작업에 있어서 일시적 이벤트가 주는 시간의 유한성은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전시의 내용까지도 소멸의 언어로 구사한다. 상실해가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토레스의 감정 속에서, 그의 사라진 전시는 그 자체로 소멸의 역사이자, 사라짐의 과정이다. 영원성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추억하고자 하는 것들을 상실해가는 과정이란 얼마나 홀가분하면서도 가슴 깊이 새겨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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