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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 포레스트 : 여름과 가을 (Little Forest : Summer & Autumn)>, 2014, 모리 준이치 감독 / 하시모토 아이 | ||
[디아티스트매거진=문희경] 기억이라는 정신활동은 삶을 한 그릇의 요리로 비유할 때 양념에 가까울 것이다. 짠 맛, 단 맛, 신 맛, 매운 맛, 감칠맛. 식재료의 식감과 향취를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양념처럼, 우리네 삶은 무수한 기억들로 간되어 있다. 과거가 되는 순간 원래의 모습으로부터 무언가가 왜곡된 채 무의식을 떠도는 이 불완전한 기억의 파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과 별 연관 없어 보이는 현재의 사건들을 통해 온전한 생명을 되찾는다. 노을이 지는 저녁― 집으로 가던 길에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오랜만에 청소한 방에서 의외의 물건을 발견했을 때 등등, 우리는 일상의 모퉁이에서 과거를 읽는다. 물론 일시적인 경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강렬하고, 때로는 고통스럽다. 기억의 재생이 되살리는 것은 당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생생한 감정들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습격은 불가항력적이어서 덮침의 순간에 무력한 나 자신이 야속할 때가 있지만, 과거가 핥고 간 오늘을 누비는 일은 감사한 아픔을 선사하기도 한다. 오미(五味)로 정의내릴 수 없는 기묘한 잔해의 맛, 그 맛의 정체가 무엇이든 삶은 그러므로 음미의 미학인 셈이다.
그 중에서도 음식과 그것을 먹는 행위는 그러한 기억의 침범을 더 쉽고, 자연스럽게 매개한다. 맛있는 음식이 준 강렬한 맛의 경험은 두고두고 되살아나 그 날의 식탁은 물론이고 함께 먹던 사람, 그와 수저나 포크 등을 맞부딪히며 오갔던 대화까지 알알이 재현하기 때문이다. 시각이나 청각보다 ‘맛’은 기억의 생명력을 훨씬 오래, 풍부하게 보존한다. 때문에 소박하지만 정갈한 한 그릇의 요리는 배를 채우는 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세계사이의 멜랑콜리한 유대를 촘촘히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서러움 중에서도 밥이 주는 서러움이 사람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도, 역시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식탁으로부터 배척당한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의 배척과도 같을 것이라.
그러나 이러한 음식과 사람사이의 애증관계를 영상에 담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맛있게 먹는 모습’만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어설프고 천박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당장 티브이에 나오는 숱한 드라마들 중에도 먹는 행위의 미학을 제대로 살려낸 경우가 드문 것을 보면, 식탁과 기억의 미묘한 줄다리기를 오롯이 담아내는 작업은 단순히 영상의 뛰어난 색채감이나 자연스러운 연기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컨대 ‘보이는 맛’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화려한 장식이나 자극적인 색감, 소리 외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법이다.
그런 면에서 모리 준이치 감독은 ‘억척스러운’ 식탁이 주는 거부감을 잘 알고 있다. 이치코는 분명 사랑에 실패해 현실도피를 선택한 지질한 캐릭터이지만, 그런 그녀의 도피가 결코 지질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음식과 요리하는 일이 사람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방식을 잘 알고 있었던 감독의 능력 덕분이다. 이치코가 코모리로 돌아오게 된 사연, 그녀의 어머니는 왜 집을 나간 것일까, 따위의 진부한 의문들을 친절히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녀의 부엌이 그 모든 것에 묵묵히 답하고 있다. 화로에서 빵이 구워지기까지의 시간, 잼으로 만든 산나무 열매의 추억, 채소의 껍질을 벗기며 엄마의 맛을 터득한 순간 등이 조용히 흘러가는 계절처럼 자연스럽게, 따뜻하게 울린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익어가는 작물들의 모습도 꽤나 시적이다. 어린 여성 농부의 이미지가 주는 신선함도 있지만, 그녀의 독백과 함께 흘러가는 농작생활에서 내뿜기는 생명력은 이치코에게 농사짓는 일이 요리만큼이나 ‘치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급자족’, 이치코의 식탁에 오른 재료들은 모두 그녀 자신을 땅 삼아 경작한 것들이다. 삶의 결을 하나하나 골라 씨를 뿌리고, 수확물을 거두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치코는 비록 도피로 시작한 귀향이었지만 그곳에서 자신만의 ‘맛’을 찾아가고 있었다. 특별한 레시피, 특별한 조미료가 없어도 그녀의 식탁은 풍성하고, 배고픈 마음은 소복하게 채워진다.
과실과 곡식이 무르익은 가을의 끝, 집나간 엄마로부터 편지가 왔다. 작은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이치코와 엄마의 계절, 겨울. 감독이 4계절의 시작을 봄이 아니라 여름으로 본 것은 이 때문일까. 그러나 속편에서 이어질 코모리의 겨울은 여느 해의 그것처럼 오래 춥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곧 지나갈 겨울을 녹이는 봄의 정체가 엄마의 귀가이든 아니든, 실패한 사랑의 회복이든 아니든. 맛이 삶을 기억하는 한 부엌의 불은 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