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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가 예술인데

   
▲ CGV 아트하우스, 출처 CGV

아이러니

[디아티스트매거진=이규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상대방에 대한 답답함을 감출 길이 없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커피숍의 전등을 필요 이상으로 오래 보거나, 마셨던 커피를 연거푸 마시거나(아우 뜨거워라), 주위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다가 그들과 눈이 마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오해의 여지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 답답함의 원인을 먼저 얘기할까 합니다. 그들은 영화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렵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주제가 불분명해서 뭘 본 건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바스키아는 좀 어려워, 현대미술은 어려워, 보르헤스는 어려워 등등. 수학시간에 곳곳에서 들렸던 ‘어렵다’라는 말이 여전히 제 귀를 간질입니다. 답답함을 뒤로 한 채, 스피노자의 말을 떠올려봅니다. “슬퍼하지도 말고 분개하지도 말며 이해하라.”

   그래서 이러한 현실의 근원을 우리나라 교육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국어선생님은 몇 페이지로 쪼그라든 소설을 채 읽기도 전에, 주제, 제재, 형식 및 구조, 인물의 성격, 당시 사회상, 소설가의 삶부터 칠판에 빼곡히 적었습니다. 학생들은 교과서 여백에 고스란히 옮겨 적습니다.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은 칠판 한가득 적힌 하얀 분필가루로 기억됩니다. 제 담임선생님이셨던 그 국어선생님이 그립긴 하지만, 엄연히 잘못은 잘못입니다. 학창시절부터 문학을 즐기기보단 분석하는 법부터 배웠던 우리는, 시험이나 점수는 그렇게도 싫어했으면서, 그 습관은 버리지 못했나 봅니다. 그래서 영화를 비롯 예술을 볼 때, 분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게 된 겁니다. 학교의 주입식 가르침을 싫어하던 그 때의 느낌(반항정신이라고 하면 다소 거창할까요?)을 되살려 이런 습관을 깨뜨려봅시다. 예술을 보고 있는 당신도 이미 그 자체로 예술가입니다, 관점과 이해를 창조해내세요. 그러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창조에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답을 찾지 않는 당신이 바로 정답입니다.

거울

   교과서에 나오는 원시인들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반라(半裸)의 그들을 보며, 행여나 행운의 노출이 있을까 유심히 봤던 기억이 납니다. 천둥번개가 칠 때 그들이 얼마나 놀랐을지 상상해 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천둥번개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 앞에서 두려움과 존경은 당연합니다. 우르르 쾅! 쾅! 인류 역사상 최초의 비평가가 외쳤습니다. “하늘이 노하셨다!” 얼마나 크게 소리쳤는지, 천둥번개 소리보다 더 큰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늘날에도 그 메아리 소리가 들릴 정도입니다. 그 후, 과학의 발전과 한결 좋아진 교육 환경 덕분에 우리는 많은 걸 이해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습니다. 프랭클린의 피뢰침으로 인류는 천둥번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런데 웬걸 피뢰침을 피해 내리치는 천둥번개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바로 예술이라 하겠습니다.

   “하늘이 노하셨다!”고 외친 그 오래된 비평가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겼는지,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비평가들은 영화에 빠졌다기보다는 분석에 빠져서 다양한 용어를 만들어냈으며,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영화에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을 해석하고 제사를 주관하던 그 오래된 사람처럼, 오늘날의 비평가들은 힘을 가졌(다고 믿었)고, 대중들 역시 그들이 힘을 가졌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의지 때문인지, 영화의 분석이 유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보면서, 가령 영화에 랜턴lantern이 반복해서 나타나면 저 랜턴의 의미는 무엇인지 몰두하며 영화를 진정 즐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분석에 빠진 이들은 영화보다, 분석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은 잊은 채, 영화와 분석만을 오가는 것입니다. 반대편에 있는, 분석을 시도하기조차 두려운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영화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분석의 소용돌이 속에서 예술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지레짐작해버린 겁니다.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이해하려는 강박 때문에 즐거움을 놓친다면, 감히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과 행동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생전 본 적도 없는 감독의 영화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반면에 거울 앞에서 우리는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나오는 스크린은 다른 형태의 거울입니다. 앤디 워홀의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 역시 다른 형태의 거울입니다. 보르헤스의 소설책도 다른 형태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거울을 볼 때, 거울을 만든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술, 영화

    예술영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궁금합니다. 영화 자체가 예술인데, 그럼 예술영화는 대체 무엇입니까?

   예술영화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으레 소수를 위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내가 영화 쪽은 잘 몰라서……” 한국 영화 시장을 대표하는 CGV는 한술 더 떠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를 구분하여 상영합니다. 아트하우스 혹은 무비꼴라주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아무래도 CGV는 상업영화뿐 아니라 예술영화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데 기준이 모호합니다. 대체 무엇이 예술영화입니까? 현재는 홍상수 영화나, <더 랍스터>, <라이프>, <이터널 선샤인>(재개봉) 등을 상영하고 있습니다. 일 년 전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주연의 첩보 스릴러 <모스트 원티드 맨>을 상영하기도 했는데, CGV는 관객이 적을 만한 영화를 예술영화로 취급하는 듯합니다. 문화를 선도하겠다고 말하는 CGV가 오히려 구분을 짓고 있습니다. 결국 예술영화란 타이틀은 하나의 훌륭한 마케팅이 되었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예술영화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째, 작품의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국내외 작가 영화. 둘째, 소재∙주제∙표현방법 등에 있어 기존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특색을 보이는 창의적∙실험적인 작품. 셋째, 국내에는 거의 상영된 바 없는 개인, 집단, 사회, 국가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 마지막으로 예술적 관점,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재개봉 작품.

   규정을 위한 규정입니다 라고 큰소리 한 번 쳐보겠습니다. 예술에 규정이라니요! 영화를 예술영화, 상업영화, 독립영화 등으로 분류하다니요. 그렇다면 2000년 전 이집트나 고대 문명에선 영화를 다음과 같이 나누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영화 시작 전에 팝콘을 다 먹을 수 있는 영화, 10년 뒤에도 여자주인공 이름이 기억나는 영화, 영화 시작 후 8분만에 괜히 봤다고 생각이 드는 영화, 동물이 소리를 내며 죽는 영화, 자동차 사고가 났는데 운전수가 죽지 않는 영화, 유리창을 깼는데 다섯 조각으로 깨지는 영화. 오늘날 우리는 아마 이런 분류 방식을 비웃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50년 후에, 현재 우리의 규정이 이렇게 비웃음 당하지 않으리라 누가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세상에나!) 예술영화는 없습니다. 영화가 있고 영화는 그 자체로 예술입니다.

   
▲ 다른나라에서 포스터, 출처 네이버

홍상수의 랜턴

   소위 예술영화의 전형으로 취급되는 홍상수 영화를 말하며, 이 글을 끝내고자 합니다.

   다음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 《다른 나라에서》를 본 사람의 실제 글입니다. “어려워서 이해를 못했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고 평론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드디어 이해가 되고, 홍상수는 정말 천재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아직 이런 영화가 어렵나 봅니다. 이 영화를 보려고 하시는 분들은, 영화를 볼 때 등대와, 랜턴, 만년필을 주의 깊게 보세요.”

   그리고 이어서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유준상의 말입니다. “홍상수 감독님이 저더러 해수욕장 안전요원 역할을 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독님께 ‘그럼 텐트를 챙겨갈까요?”라고 물었습니다. 감독님은 ‘오, 텐트 좋겠네요.’라고 답하셨습니다. 또 제가 ‘감독님, 촬영지가 바닷가이고 하니까 기타를 챙겨갈까요?’ 그랬더니, 감독님이 ‘오, 기타 좋겠네요.’라고 답하셨습니다. 촬영 전날 밤, 짐을 챙기는데 랜턴이 하나 보이더군요.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감독님께 물어봐야지 싶었는데 시간이 이미 늦어서 그냥 챙겼습니다. 텐트 앞에 랜턴을 두고 연기를 했는데, 칸 영화제에서 랜턴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랜턴이 의미하는 것이 뭔가 하고 말입니다. 아무 생각없이 들고 간 랜턴이 영화의 중심소재가 된 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하늘이 노하셨다!”는 외침소리가 곳곳에서 들립니다. 2000년 전의 사람이 오늘날 환생하여 천둥번개를 보고 “하늘이 노하셨다!”고 외친다면, 현대인은 그 사람을 광인 취급하거나, 괜찮은 유머감각이었다고 웃고 넘길 겁니다. 이렇듯, 영화를 보고 분석하려는 우리의 모습은, 천둥번개에 숨은 뜻을 찾으려 애쓰는 원시시대 사람들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결국 랜턴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또한 천둥번개도 ‘하늘의 노하심’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습니다. 정작 우리가 분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사실상 분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니, 그러지 말고 그냥 느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랜턴을 들고 놀러 갔던 사람에게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겁니다. 다만 개인적인 의미이지, 절대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절대적인 의미란 없기 때문에 평론가의 말을 쫓을 필요도 없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랜턴의 의미를 알지 못해 ‘영화는 어렵다’는 말로, 영화를 멀리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고 답안지가 등장하는 영화는 없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니라, 당연하게도, 정답을 찾지 않는 당신이 바로 정답입니다. 갑작스레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해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을 인용하려고 벼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쫓기 위해 나의 어리석음을 포기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되면 모든 영화가 그 나름대로 다 재미있고 어렵지 않습니다. 《베테랑》은 하나의 예술이고 재미있습니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역시 또 하나의 예술이고 재미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어려울 것 없는, 답 없이 즐길 수 있는 우리 시대의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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