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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반납하고 선택한 자발적 복종?

[디아티스트매거진=양효주]

자유를 반납하고 선택한 자발적 복종?

:르네상스 원근법으로 현대사회를 해석하다

   

 Lesly Oldaker, Follw me, 2013, 출처:구글이미지

     

    사회학이란,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냐’의 물음으로 시작된다. 구성요소가 작동하는 원리, 그리고 이 구성요소가 존재하는 원리, 마지막으로 이것이 과연 인간의 삶에 가치가 있느냐를 따지게 된다. 그래서 사회학은 ‘인식론’-‘존재론’-‘가치론’을 다룬다. 그런데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시대에 따라 변천해온 현대성(혹은 근대성)을 파악하기 위해 미술사를 공부하기도 한다. ‘시각’이라는 것이 ‘현대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가장 빛나는 성과를 세 가지만 꼽으라면 해부학, 인체비례, 원근법을 들 수 있다.  *원근법(遠近法)은 눈에 보이는 사물(3차원)을 평평한 면(2차원)에 묘사하여 그리는 기법이다.

이 요소들은 재현의 자연스러운 역동성을 부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원근법은 단순한 기법 이상의 것이었다. 사물의 원근과 공간의 관계를 평면 위에 재현하는 방식은 미술을 과학의 반열에 올라놓았다. 가령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가 1550년에 출간한 <예술가들의 생애> 초판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일컬어 ‘과학 지식을 기독교적 믿음보다 더 높은 자리에 두었다’ 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예술가들이 과학지식을 바탕으로 예술의 리얼리티를 높이면서 신성의 영역을 넘나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근법 특징 정리표,  출처: 양효주,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bomnal0407

      근대 합리주의적 인식(recognition)은 ‘명석판명함’(clear and distinct)으로 표상된다. 인본주의적 이상을 바탕으로 회화를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은 전체를 관장하는 한 설계가(예술가)의 이념이나 계획아래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다. 이는 합리적이고 나아가 기능적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미적인 가치는 고전적 미의 기본 원리인 비례, 균형, 조화 등과 같은 척도로 분석되었다. 이 점은 형식의 아름다움에 초점을 두어온 근대의 서구 미학의 형식주의 이념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르네상스에서 발원하여 데카르트적 코기토(cogito) 철학에서 정립된 시각중심주의(ocularcentrism)의 혹은 이성중심주의의 한 양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본다’라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서구 철학에서는 ‘본다’라는 것은 ‘사유한다'(생각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안다’라는 논리를 가졌다. 그리하여 감각기관중 시각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고, 르네상스 회화 구성도 이 시각논리에 따른 것인데 그것이 바로 원근법이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에서 언급된  “평면의 캠버스(화면)=창문”의 이론는 16세기, 뒤러에게 와서 좀더 면밀해 지는데, 바로 ‘격자망’, ‘베일의 창문’이다. 회화의 대상(모델) 앞에 격자가 쳐진 창을 세운다. 그리고 그 앞에 종이를 두고 창문의 것과 똑같은 크기의 격자를 그려 놓는다. 그런다음 고정된 자에 화가가 한쪽 눈을 고정시키고  보이는 대로 그려나간다. 즉 대상이 점유한 창의 격자 크기 만큼 꼭 같게 종이위 격자에 그리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을 기반으로한 철저히 수치화시켜 그린 것으로 수학적, 기하학적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출처: 양효주, 네이버 블로그 blog.naver.com/bomnal0407

    소실점은 관람자가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의 중심점으로 관람자는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이미 화가가 설정해 놓은 하나의 중심점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다. 즉 관람자는 자기 의지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도록 한 것을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원근법에서 규정되는 주체의 시각은 살아있는 인간 개인의 신체기관으로서의 눈이 담지하는 시각이 아니라, 그 신체의 눈과 분리된 시각이라 할 수 있다.

   
투시원근법 원리, 출처: 구글이미지

원근법에서 주체는 가시적인 공간에서 대상 세계를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배열한다. 주체는 이 조직과 배열의 중심이다. 따라서 주체와 분리된 대상 세계의 창출과 존재는 주체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주체의 시점은 소실점과 일치하게 되고 원근법적 시각 공간에서 보이는 것들은 이 소실점을 중심으로 배열되고 조직됨으로써 소유와 지배의 대상이 된다. 말하자면 모든 것을 보는 사람의 눈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레오나드로다빈치, <최후의 만찬>

    시각 공간을 미리 합리화하고 그 속에서 보이는 것들을 시각적 통제의 대상으로 만드는, 그러므로 원근법의 시각 양식은 주체로 하여금 대상 세계와 거리를 두게 하는 동시에 그 대상 세계를 자신의 시각에 의해 기하학적으로 조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원근법의 응시는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소유한다” 에 해당된다.

“노예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노예에게 주인이 있는 한 노예는 행동 하나하나마다 주인에게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의존은 ‘주인’에게서 나오는 명령과 충고를 따름을 함축한다. 개인의 삶과 안녕은 더 광범위한 ‘상위’계획, 즉 주인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계획의 일부가 된다. 무엇보다 의존은 주인의 의지를 따르려고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단념하도록 한다. 또한 의존은 주인의 계획에 봉사하고자 자기 개발과 성취를 단념하게도 한다. 노예는 기꺼이 명령을 따를 수도 있고, 단순히 처벌을 피하려고 따를 수도 있다. 노예는 기계적으로 복종할 수도 있고, 주인의 계획을 이루고자 자신이 하는 일에 완전히 몰두할 수도 있다. “

-몬트세라트 귀베르나우 지음, 유강은 옮김, <소속된다는 것-현대사회의 유대와 분열>

    어디에 ‘소속된다는 것’ 은 ‘안위’와 ‘속박’을 동시에 의미한다. 단체의 목표달성이 곧 내 삶의 목적이 되고 종국에는 내가 소속된 단체의 정체성이 곧 나 개인의 정체성으로 둔갑한다. 이뿐인가, 요즈음은 개인의 나르시시즘이 사회적 위상, 명성, 부를 갖춘 단체에 기인한 ‘공동체 나르시시즘’으로 이행된 현상을 보인다. 내가 소속된 단체가 갖는 사회적 힘과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소속 단체의 구성원으로서의 나의 위상도 동시에 드높아지는 쾌를 느끼는 것이다.

근대시대 이래로, 인간은 ‘자연적 존재’가 아닌 ‘제도적 존재’로 변모했다. 인간과 원숭이를 구별하던 자연분류체계에서 ‘학생’ ‘교사’ ‘군인’ ‘기혼자’ ‘미혼자’ 등과 같은 비물리적, 비생물학적인 속성소를 통해 구별한다.

   

L.S Lowry, Coming out of school, 1927, 출처:구글이미지

그런데 생리적 물리적인 것과 같은 실재적인데 근거를 두지 않고 사회구조(혹은 문화적 성격)에 의해 태동한 제도적 존재를 과연 나의 존재론적 ‘실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할까?

인간은 무엇이든 규정지으려하고, 정의를 내리고, 체제와 질서를 세우고, 자격을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때문에 이 분류체계 범주에서 배제된 -분명히 존재하나 기존 분류체계로는 설명되어지지 않는, 포괄할 수 없는, 혹은 부정하고 싶은 불쾌한 것은 삭제해버리는- 이들은 허술하고 비공식적이고 형체가 불분명하여 급기야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이렇게 배제된 군상들 -없는 것처럼 감추고자 하나 분명히 존재하는 우리 삶의 이면들을- 을 시각영상물로 친절하고 적나라하게 풀어놓기에 그토록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영화라는 오명을 입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 영화들, 출처:구글이미지

    사회 분류체계와 기준들은 논리의 토대로 세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보다 심층적인 조건이 요구 되지 않을까? 제도적 존재로는 인간에 대한 실재적 정의를 내릴 수 없고, 혹 이것이 현 사회에 적법하게 적용된다 할지라도 필요조건만을 충족시킬 뿐 결코 충분치 않다.

그러나 현 사회에서는 제도의 기준에 따라 나의 존재론적 가치의 값이 매겨지고, 특정 자격을 부여받게 된다. 나는 사회 제도 안에서 소속되어있을 때만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며 제도 밖의 규정되지 않는 독자적 개인으로서 존재하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나’는 ‘나’의 자유를 반납하고 자발적 복종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제도적 사회는 논리의 세계이며 앎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가능의 세계’를 위협한다. 상상할 수 있거나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세계를 차단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한 인간을 설명할 때에(정의라는 낱말의 사용은 조심하고 싶다) 지각적 대상으로서가 아닌 ‘의미의 단독체’로서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David FeBland (american british figurative painter) 출처: 구글이미지

무한한 가능세계를 지닌 자유로운 개인이 사회체제의 폭력 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날을 고대해보며.자유로운 독자적 개인의 가벼운 방랑생활, 그 진정한 안식을 찬양한다.

   
 

 양효주  프리 칼럼니스트

 서울에 거주하고 있으며 학부 및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습니다.

 예술에 온 정신이 팔린 사람이자 미술사 지식을 밑천 삼아 열렬한 실천가가 되  기를 소망하는 올해 서른 살 처자입니다.

 blog.naver.com/bomnal0407 / 페이스북페이지: 효주’s 휴머니스트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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