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화된 글쓰기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필자가 자주 사용하는 스마트폰 앱 중에 ‘에버노트’라는 앱이 있다. 일종의 메모노트 어플인데, 스마트폰은 물론 PC나 태블릿과도 연동이 되기 때문에 무척 유용한 어플이다. 에버노트에서 특히 간편한 기능은 내가 메모한 노트들을 ‘스니펫’ 목록으로 볼 수 있다는 건데, 쉽게 말하면 ‘펼쳐보기’이다. 여러 개의 노트를 한꺼번에 펼쳐서 보면 어떤 내용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알아내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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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정>은 파편화된 사건들이 이어지는 연극이다. 처음에는 집중하기 쉽지 않지만, 나중에는 그 불안정하고 파편화된 세계에 익숙해진다. | ||
연극 <치정> 또한 이런 식으로 사건들을 펼쳐서 보여준다. 이른바 파편화된 글쓰기다. 그래서 처음 연극을 접하는 사람들은 그 흐름을 따라오기가 다소 벅찰 것이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즉 액자 형식으로 사건을 전개하는가하면 갑자기 영상극이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이 담겨 있다. “2년 전인가, 극작 수업에서 구조주의적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학생들에게 “살인사건을 다룬 신문기사 10개 정도를 찾아서 벽에 붙여봐라. 그럼 어떤 식으로든 주제가 나올 것이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 문득 학생들한테만 시킬 게 아니라 내가 써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살인사건들을 모아 한 번 써 보게 되었죠.”
파편화된 글쓰기는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여러 사건들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은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치정은 곧 정치’라는 메시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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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정이 곧 정치라는 작가의 표어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치정의 본질을 꼬집는 말이다. | ||
치정=정치?
<치정>에서는 제목 그대로 치정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보여준다. 춤꾼 대학생과 사모님 사이의 치정, 스승과 제자 사이의 치정, 온라인 커뮤니티 학회원들의 치정. 하지만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권력관계가 숨어 있다. 이를 작가는 ‘치정은 정치다.’라는 언어유희를 통해 표현한다. 예컨대 연극에 등장하는 살인사건 중 하나인 ‘한국고고학회 살인사건’을 살펴보자. (온라인에서) 서로 사랑하던 연인 흑산과 카르멘은, 카르멘이 지역감정을 빌미로 흑산을 밀어내자 흑산이 직접 카르멘에게 찾아가 살해한 사건이었다. 온라인 연애라는 단순 치정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상도-전라도라는 정치관계가 살인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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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관계에 따라 일어난 살인. 과연 치정에만 해당하는 일일까? | ||
치정관계를 정치관계로 생각한 작가의 사고도 흥미롭지만, 연극 후반부를 치정보다 폭력관계에 따옴표를 찍은 것도 이 연극의 묘미라 할 수 있겠다. 흑산과 카르멘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깡패들의 역사와 전설을 이야기하며 서로 다투는데, 이것은 여기서는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아주 흡사하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형제끼리 목숨을 걸고 싸우는 비극인데 작가는 이를 현대조폭사에 차용함으로써 폭력의 계보가 지금까지 이어짐을 드러낸다. 쉽게 말해 폭력적 정치관계인 치정의 역사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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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력의 계보는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이어진다. | ||
<치정>은 남산예술센터의 2015년 시즌 마지막 프로그램이다. 11월 19일 프레스콜을 시작으로 처음 문을 연 이 연극은 12월 6일까지 계속된다. 라이브공연과 5~60년대 사교댄스까지 감상할 수 있는 <치정>. 정치와 사랑, 사랑과 폭력의 관계를 고민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는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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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정>의 포스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