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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파인더

[디아티스트매거진=안경은] ‘양손프로젝트’의 신작, <폭스파인더(Foxfinder)>를 관람하였다. 폭스파인더는 말 그대로 여우를 수색하는 사람이다. 연극에서는 몸 길이 70cm 포유동물에 지나지 않는 여우에게 전지전능한 악마의 이미지를 뒤집어씌운 후 이 공공의 적을 처단하는 데에 모두가 협조할 것을 강요하는 헤게모니를 창조한 정부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연극은 중세시대 마녀사냥의 응용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폭스파인더가 사무엘과 주디스 부부의 농장에 파견 나오면서 시작된다. 폭스파인더가 마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부터 불안해하는 부부의 모습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들에겐 여우보다 폭스파인더의 존재가 더 위협적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 두산아트센터

그런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오는 폭스파인더의 모습이 너무나 순박하다. 알고 보니 5살 때 부모의 품에서 떼어져 ‘여우=악마’라고 세뇌당하고 훈련받은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고작 19살이라는 나이의 그가 맡은 소임은 단순히 여우 수색 현황을 정부에 보고하는 일에서부터 의심쩍은 정황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탐정 역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 두산아트센터

무대는 ‘마녀사냥’이라는 키워드 하나만으로 요약 가능한 줄거리만큼이나 담백하다. 마주 보고 있는 관객석 가운데에 있는 흰 커튼, 흰 기둥, 흰 바닥, 모든 걸 훤히 비추는 조명이 전부이다. 그나마 배우들이 틈틈이 배치를 바꾸는 흰 의자 몇 개만이 지금 여기가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는 곳이라는 걸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배우들이 무대에 들고나오는 노트, 삽, 총 등의 소품이 지금 여기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켜준다. ‘휑한 무대 위에서 뻔한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100분 동안 끌고 갈 것인가?’ 난 그게 가장 궁금했다.

어떤 게 진실이고 거짓인지, 누가 선이고 악인지가 분명하게 나뉜 채로 시작된 연극은 끝날 때 진실이 거짓으로, 거짓이 진실로,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완벽하게 뒤바꿔있는, 실로 놀라운 결말을 맺는다. 우리가 규정했던 개념과 존재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반대로 이동해가는 걸 생생하게 목격하는 게 어찌나 재밌던지.. 무대 위에서 배우는 울상인데 관객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들을 관통하는 ‘여우’는 욕망 속에서 창조되어, 두려움 속에서 성장하고, 슬픔 속에서 증폭된다.

   
▲ 두산아트센터

헌데 겉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사무엘의 아내, 주디스이다. 주디스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사력을 다하되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밀도 있게 풀어낸 게 이 연극의 묘미지만, 주디스 역을 맡은 여배우의 연기는 내게 특히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슬픔이 보상받기를 바라며 정신을 놓아버리는 사무엘과, 그동안 억눌러왔던 욕구가 보상받기를 바라며 제정신을 차린 폭스파인더 사이에서, 그녀는 온전히 자기중심을 잡고 서 있다. 두 남자가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동안 그녀는 절대 두려움에 무너지지도, 슬픔에 잠식되지도 않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감당하는 힘은 바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연극은 우리에게 말한다. 두려움은 잃을 게 있을 때 생겨나는 거라고. 아들이 사망한 후 잃을 게 없어진 사무엘은 용감해진다. 그리고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여우에게 모든 탓을 돌린다. 반면 주디스를 만나 잃을 게 생긴 폭스파인더는 비겁해진다. 그리고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여우는 일종의 무기가 된다. 그러나 주디스는 달랐다. 아들이 죽어 ‘잃을 게 없는 사람’인 동시에 남편이 있어 ‘잃을 게 있는 사람’이었지만 어떤 쪽으로든 정부를 닮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내면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사랑으로 몰아냈다.

   
▲ 두산아트센터

이 연극이 주는 메시지를 읽지 못한 관객에게는 꽤 지루한 100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이 어떤 걸 시사하는지 읽은 관객에게는 통쾌한 100분이 되었을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폭스파인더’를 한번 ‘IS’로 바꿔서 다시 이 연극을 복기해보시라.

최근 러시아 여객기 테러에 이어 파리 도심에서 테러가 일어났다. 생존자의 증언에 의하면 “법인 중 한 명은 젊다 못해 어린이 같은 얼굴이었다.”고 했다. 아무 말 없이 차분하게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고,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워지면 폭탄조끼를 터뜨려 자폭했다고 한다. 테러범들은 전 세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고, 다음 테러를 예고하는 동영상을 인터넷상에 올려놓았다.

이에 대해 세계는 즉각 분노했고 언론은 실시간으로 관련 소식을 전했다. 현재 용의자 추적과 그들의 본거지를 소탕하는 보복이 진행되고 있다. 각국은 테러 관련 대책과 예산을 마련하고 있으며, 다음 테러 대상으로 지목된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이런 정신없는 혼란 속에 당신이 놓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슬퍼하겠는가? 증오하겠는가? 슬퍼하지도, 증오하지도 않는다면 당신을 악마의 협력자라고 판단해도 되겠는가? 나는 거대한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주디스’를 보았다. 파리 테러로 아내를 잃은 파리 시민, ‘앙투안 레리스’는 SNS에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들은 내 분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Vous n’aurez pas ma haine.” 또한, 한 전직 기자는 앞다투어 테러 소식을 전하는 언론을 향해 “테러에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테러의 결과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욕심에 눈이 먼 자이든, 분노에 눈에 먼 자이든, 다 같이 장님이 되는 순간 테러의 목적이 달성된다는 걸 안다. 테러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저지르는 행위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함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휩쓸리지 않겠다는 것이고, 삼켜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어리고 어리석은 테러범을 조종하는 누군가의 의도대로 마음을 잠식당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내 가슴을 친다.

부디 그들이 잠식당하지 않기를 빈다. 그리고 부디 저들이 깨어나길 바란다.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건 오로지 빛이기에. 또 다른 어둠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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