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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포애프터 포스터 (이하 사진제공 두산아트센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정인태] 비포 애프터. 렛미0같은 성형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단어이다. 단지 외모를 바꾸는 것인데 늘 그 계기가 있다. 성형하기 전의 전(비포)이 있다. 선정이 되면 비포이기 전에 꽤 괜찮았던 비포, 못생겨진 비포, 예쁘게 성형한 애프터, 방송은 되었지만 선정이 되지 않으면 비포, 비포, 스스로 깨닫고 노력하는 비포ing.. 사소한 계기든, 태생적인 계기든, 큰 사건이든 어떠한 계기로 사람은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연극은 배우들이 비포에서 애프터가 된 계기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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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이 겪은 사건들은 공통적으로 어떤 ‘죽음’을 경험한 것이다. 늙어서 병들어 죽든, 갑작스럽게 죽든, 스스로 목숨을 끊든 죽음은 언제나 충격적이고 파급력이 크다. 그저 한 사람, 한 집단의 죽음이 10명, 100명, 수천 수만 명, 국가 전체, 세계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친다. 진시황이라는 폭군의 죽음은 나라가 분열되어 항우와 유방이 수십 년간 패권을 다투는 계기가 되었고, 전태일의 죽음은 민주화의 불씨가 되었다. 이렇듯 죽음이 주는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죽음은 왜 이렇게 파급력이 큰 것일까? 장 뤽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서는 죽음을 이렇게 말한다.
사랑, 국가, 역사는 오직 죽음 속에서만 진리를 획득한다.
공동체는 죽음을 통해 스스로 타자에게 드러낸다. 죽음은 공동체를 통해 스스로 타자에게 드러낸다.
여기서 진리란 ‘그동안 나는 당장 내일에라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왔지만, 나 역시 죽어간, 죽은 저 사람처럼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배우들은 아버지의 죽음, 친구의 죽음, 같이 시위했던 사람들의 죽음, 세월호와 같은 재난 같지만 인재(人災)라 할 수 있는 죽음들 앞에서 겪었던 커다란 상실감을 연극으로 표현했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사람이 죽은 사람의 행동과 말투를 따라하며 죽음을 간접경험해보는 듯한 연기가 인상깊었다. ‘그는 이렇게 죽어갔다’ 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나는 그를 잊지 않겠다’ 는 다짐으로 보였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 지식을, 지혜를 확실하게 각인하게 되니 이런 간접경험을 갖는 것은 온 몸으로 잊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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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에서 특히 세월호에 대해 길게 언급이 되었는데 난 보면서 굉장히 부끄러웠다. 작년 세월호 사건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노란 리본을 매고 달며 잊지 않겠다 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대체 뭘 잊지 않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점점 삶은 궁핍해지고, 정치든 경제든 국제 정세든 뭐든 다 (내 생각에는) 일종의 ‘죽음’으로 내닫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살려고 발버둥만 치고 있는데 결국은 세월호 사건 이후로도 우린 깨달은 것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어제는 무엇을 누구를 위해 살았고, 오늘은 누구를 위해 열심히 살았나? 결국 어제나 오늘이나 몇 달 전이나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데 미래라고 뭐가 다를까? 여전히 타인은 안중에도 없다가 죽음을 보고서야 깨닫고 다시 또 잊혀져갈 것이다. 세월호 이후 또 다시 배 사고로 목숨을 잃고, 확실하게 조사하겠다고 하니 또 관심이 없어지고, 관심이 없어지니 범법자들은 풀려나고, 또 다른 가십거리로 덮어버리니 점점 삶이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보면 잊지 않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큰 충격과 영향을 주지만 끝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고, 반성하는 것은 참 어렵다. 끊임없이 되뇌이고 곱씹어보는 것만이 답이 될 수 있는데 이 연극은 그런 역할을 (지겹게도) 하고 있다. 지겹게 느껴지더라도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세월호 사건을 언급하고 또 언급하여 그 사건의 표면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연극이어서 작년에 신촌에서 ‘오늘 무엇을 기억하며 무엇을 위해 행동하겠습니까’ 라고 썼던 나 또한 반성하며 다시 다짐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