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2,3년 전에 비하면 확실히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혜화역 4번 출구에는 삐끼들이 분주하다. 공연예술에 대한 관심 또한 예전에 비해 증가했기 때문일까. 바야흐로 ‘대삐끼시대’다. 그런데 그들이 나눠주는 팜플렛을 보면 대개가 비슷한 공연이다. 이름도 내용도 왠지 모르게 비슷한 냄새가 풀풀 나는, 어쩐지 상업주의 영화를 연상케 하는 연극들. 그중에서도 <죽여주는 이야기>의 홍보는 단연 돋보인다. 지하철 역내에는 물론,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관련 포스터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식당을 들어가봐도 해당 공연의 할인권이 비치돼 있어 제값을 주고 공연을 보는 사람은 호구로 취급받을 정도다. 게다가 홍보대사들의 활약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다. 안 본다고 해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한 번만 보라고 권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는 나이트 삐끼를 방불케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끌려 연극을 보러 가면 관객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첫째, 배우들이 정말 잘생겼다. 둘째, 그것 빼곤 연극에서 볼 게 없구나. 문제는 바로 이 두 번째 인식이다. 대학로에 도착해 처음으로 연극을 접하는 사람은 삐끼에 이끌려 연극을 볼 확률이 높은데, 그들은 공연을 보기도 전에 일단 기분이 잡치고, 본 후에는 이같이 연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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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화에서는 홍보대사들로 가득하다. 지하철은 물론이고 각종 노점상과 식당마다 단일한 연극 포스터로 가득하다. (사진출처: 2015.05.15. ‘대학로 호객행위는 어디까지’ 후아이엠 인터넷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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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홍보를 하는 거야 모든 공연매체가 하는 일이고, 홍보 없이는 인지 또한 없는 법이니 홍보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삐끼들도 ‘돈 받고 하는 알바생’이니 그들을 욕하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다면 이 사태의 책임은 누구에게 물어야겠는가. 공연팀과 극장일까? 방식이 아주 옳지는 않지만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다한 것이다(일단은 그렇게 생각해 두자). 비판받아 마땅한 대상은 이러한 연극에 과다한 수식어를 붙이는 기자들이다. 공연미학의 부흥에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이들이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명품연극’, ‘대학로 대표’, ‘지상 최고의’ 등 쓸데없는 수식어를 붙이기 바쁘다. 자본의 동원에 의해 마치 최면처럼 이루어지고 있는 이러한 행태는 분명 공연예술계에 해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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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들이 기사거리를 찾아 헤매는 건 이해할 만하지만, 아직 문화의 불모지인 공연예술계에서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비판받아 마땅하다. | ||
지금은 불모지를 벗어났다고 평가 받는 영화산업 분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시인 김수영이 <기적>이라는 영화를 본 뒤 어떤 기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관객이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 김수영이 영화가 저속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자 기자는 반대로 ‘이 영화가 너무 고급이라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한 김수영의 일침이 가관이다. “여보, 너무 관객만 얕잡아보고 책임을 관객에게만 전가하지 마시오. 당신네들 신문사도 나빠요. 이런 것을 의욕적이니 야심작이니 하고 추켜주니까 소위 <문예영화>의 사태가 나는 거지. 우리 여편네도 사실은 그 바람에 속아서 요전에 나하구 같이 와보았는데, 10분도 채 안 보구 나가자구 그럽디다. 그게 문예영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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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영화 <기적> | ||
이처럼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혜화에 분명 좋은 연극과 소극장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혜화를 대표하는 연극은 <죽여주는 이야기>이다. 대학로에서 연극 꽤나 봤다는 사람은 ‘그럴 리 없다’고 손사래 칠 수도 있지만 현실이 그러하다. 연극 경험이 많지 않은 일반인이 무슨 기준으로 연극을 택할까. 홍보 포스터가 지하철은 물론 노점상마다 붙어 있고 삐끼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해당 연극의 팜플렛을 나눠주니, 짧은 경험으로는 ‘이 연극이 제일 핫하구나!’하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연극에는 결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설령 누군가는 좋은 연극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대학로를 조금만 돌아다녀보면 이 연극보다 훨씬 더 좋은 공연을 금방 발견할 수 있다. 단 2,3천원 차이로도 말이다. 그러나 그러한 ‘약간이라도 더 나은 연극’은 입소문이라도 퍼지지 않는 한 묻히기 마련이고, 돈이 없는 대학생들은 값과 질이 함께 저렴한 <죽여주는 이야기>를 보고 연극에 편견을 갖게 된다. ‘연극도 딱히 별 거 없구나. 이걸 볼 바에야 차라리 더 싸고 화려한 영화를 보겠다’는 생각이나, ‘연극의 가격은 이 정도밖에 안하는구나ㅡ그런데 왜 다른 연극들은 뭘 믿고 그렇게 가격이 비싸지?’라는 생각 말이다. 어느 쪽이든 현 연극계에 악영향을 미침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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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연극들의 포스터가 말하는 알레고리와 <죽여주는 이야기>에서 말하는 그것은 분명 다르다. | ||
그렇지만 이런 고민은 해당 연극만 탓한다고 해결될 건 아니다. 김수영의 말을 한 마디 더 들어보자. “그러나 그렇다고 혹평을 하고 욕을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원인은 더 깊은 데 있어. 그 원인을 파헤치지 못하는 우리들 글을 쓴답쇼 하는 친구들도 사실은 그 미국배우의 흉내를 내는 배우보다 나을 게 있나.” 결국 문제는 글쓴이에게 있다는 말이다. 지식인이 흔하지 않았던 60년대(김수영과 기자의 대화가 쓰인 글은 67년에 쓰였다)에 비해 지성인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여전히 비판은 거의 않고 칭찬일색만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들 글을 쓴답쇼 하는 친구들’의 실상이다. 물론 여기에는 필자 스스로에 대한 비판도 함께 들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김수영의 이야기는 1967년 「<문예영화> 붐에 대해서」라는 글에 나온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의 글인데, 그 상황은 분야만 다를 뿐이지 요즘의 상황과 꼭 같다. 즉, 50년 전의 영화산업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은ㅡ산업이라 칭하기는 조금 그렇지만ㅡ공연산업이 겪고 있는 것이다. 기자가 비평가가 될 이유는 없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랍시고 비평 없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비평적 태도는 영화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기자건 비평가건 소설가건 모두가 취해야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에 취해 보지도 않은 연극을 아주 우수하다며 비슷한 기사를 찍어내는 것이 요즘의 실태다. 국가로부터의 언론 자유를 부르짖었던 김수영이, 자본에 종속당해 여전히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 놓인 현대의 언론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를 기를 만한 자격이 없다.”
– 「 김이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196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