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구지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미술관에 들렀다. 미술관과 여행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주제가 공항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자신이 채워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공항에 가보면 된다. 공항에 앉아 미소 지을 일들이 떠오르거나 괜히 힘이 차오르는 사람이 있고, 한없이 자신이 초라해 보이거나 마음이 어두워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공항에 가지 않는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보여줄게 없다. 세상의 경계에 서보지 않은 나에게, 세상은 아무것도 가져다 줄 게 없다.”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中
“수많은 사람들 속을 지나쳐 마지막 게이트야
나도 모르게 안절부절하고 있어
이럴 땐 침착해 좀 자연스럽게
파란 하늘위로 훨훨 날아가겠죠
어려서 꿈꾸었던 비행기 타고
기다리는 동안 아무 말도 못해요 내 생각 말할 순 없어요.”
거북이, <비행기>中
십여 년 전 유행했던 가요에서 비행기는 어린 시절의 꿈과 설렘이다. 그 어떤 교통수단보다도 비행기는, 특별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인간의 오랜 꿈을 실현시켰고, 그 파란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가기 위한 필수 관문인 공항은 그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공간이다. 시인이자 여행 에세이로 유명한 이병률 시인의 글에서도 공항은 세상의 경계에서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는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언제부터 생겨났는지 모르겠는 ‘공항패션’이라는 용어는 이미 연예계를 넘어 일반 사람들에도 통용되는 단어이자, 일상의 룩과 다른 특정한 스타일로 구분된다.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라오는 유명인사들의 스타일은 매출과 긴밀하게 연관되기도 하고 그들의 파급력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공항패션에 주목하는 이유는 단지 셀럽들의 평상복을 볼 수 있기 때문은 아니라 ‘공항’이라는 장소의 특수성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장소도 단연 공항이라고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주인공들은 헤어지고 만난다, 그리고 단지 문 하나를 두고 일상적 공간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며 서로에게 닿을 수 없음에 슬퍼한다.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는 세계가 주목하는 현대미술가 듀오 엘름그린&드라그셋의 개인전 <천 개의 플라토 공항>을 개최했다. 전시 소개에 따르면, 유리와 철로 된 플라토 미술관의 독특한 건축구조와 명칭을 모티브로 한 이 전시는 일종의 언어유희를 통해 미술과 철학, 그리고 우리의 일상 공간을 동일선상에 두고 현대성에 대한 사유를 시도한다고 한다. <천개의 플라토 공항>이라는 명칭은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천개의 고원(플라토)』(1980)에서 가져왔다.
앞서 말했듯이 공항은 비일상적인 공간이자 발붙인 현실과 꿈의 경계로 표상되기도 한다. 이 특수한 공간은 무한한 해방감과 자유를 주지만, 동시에 철저한 통제의 공간이기도 하다. 공항의 거대하고 치밀한 시스템은 권위적이고 그 앞에 선 개인은 무력해지고, 정체성은 불안해진다. 입국 관리소에서 개인은 정체를 의심 받을 수도 있고, 내가 설명하는 ‘나’는 내가 아니다. 대신 여권의 쓰인 정보가 ‘나’이다.
엘름그린과 드라그셋은 유리와 철로 된 플라토 미술관의 건축구조가 공항을 떠올리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미술관에 구현된 공항의 모습은 꽤나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종의 기념품인 항공권을 받는다. 내부엔 보안검색 구역, 탑승 대기와 탑승 구역, 그리고 수화물 수취 구역과 면세점 구역을 사실적으로 배치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그것은 모두 조금씩 현실에서 뒤틀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게이트의 운항 정보 전광판에는 엘도라도(El Dorado)로 가는 비행기의 시간이 나와 있는가 하면, 지연된 비행기는 라캉(Lacan) 행이다. 흔히 볼 수 있는 아이스박스는 주인을 잃은 채 버려졌는데 알고 보면 무거운 청동으로 만들어 졌다. 그런가 하면 바(Bar)는 뒤집혀져 있고, <무력한 구조물> 시리즈는 제 기능을 상실한 문들의 집합이다. 이는 멀리서 보면 공항의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답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내파적으로 균열을 일으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지배논리, 혹은 현대 사회의 허점을 공략하고 교란하는 행위이다.
<천개의 플라토 공항>안에서 관람객은 현대성의 집약으로서의 공항을 몸소 ‘체험’하고, 불확실한 존재가 되어볼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전시장 안에서의 역할놀이일수도 있지만 현실이기도 하다. 특수한 공간으로써의 공항에서 환기되었을 뿐 일상에서 자각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전시장을 나가면서 전시장 밖에 설치된 작품인 공중전화 부스 안에 들어가 보았다. 수화기를 드니 “나는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렇게 주체성을 제거하고 불확실한 존재로 만들더니, “당신”이라고 불러주는 것이었다. 아이러니. 균열이 일어났다. 나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