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한국사회에 대한 청년의 인식을 나타내주는 단어라면, 웃프다라는 단어는 그런 청년들의 감정을 잘 나타내준다. ‘웃기다’와 ‘슬프다’의 합성어인 ‘웃프다’는 주로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를 장난스레 비관할 때 사용하는 단어로, 이제는 대학생 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될 정도로 그 활용이 무궁무진하다.
![]() |
||
| ▲ 웃픈 감정을 잘 나타내는 사진들. 웃픈 사례는 다이어트, 육아, 사회이슈 등 다양하다. | ||
헬조선, 웃프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에 사는 청년들은 문제(특히 사회나 정치)를 극복하는 데 있어 상당히 현자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취업률은 IMF 이후 최악이고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미래에 대한 부담이 그 어느 세대보다 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시기보다 노력을 강요당한다. 불평등 지수를 살펴보면 그저 막연했던 느낌이 객관적인 한숨으로 변한다. 2012년에 조사한 결과, 상위 10%의 임금은 하위 10%에 비해 5.83배에 달하고 지니 계수는 0.39였다고 한다. 조사 대상국 중 임금 불평등이 가장 심했다고 하니, 한숨이 절로 나올 뿐이다.
![]() |
||
| ▲ OECD 주요국의 불평등 지수(출처: 경향신문) | ||
이렇듯 헬조선에 살고 있는 청년들이지만, 신기하게도 그들은 분노하지 않는다. 대신에 쿨하게 웃어넘기는 일이 다반사다. 그렇다고 ‘어쩔 수 없지, 뭐.’하고 포기하거나 체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어쩔 수 없이 그냥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웃어 넘길거야.’라는 의지적 감정이 엿보인다고나 할까. 부조리와 불평등에 분노하는 대신 ‘하하하’하고 웃어넘기는 모습은 청년들의 성숙한 면모인지, 아니면 체념의 끝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이같이 청년들이 웃퍼하는 모습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게시글을 올릴 때 운영자로부터 삭제(짤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첨부했던 사진이 지금은 ‘짤방’이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SNS에 퍼지고 있는 현상만 봐도 그렇다. 짤방을 통해 청년들은 자신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데, 분노든 슬픔이든 기쁨이든ㅡ어떠한 감정이든 그것은 대개 웃음으로 끝이 난다. 즉, 짤방의 미학은 웃픔의 미학이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웃픈 감정이 사회에 퍼졌을까?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필자는 온라인 교류가 이전에 비해 급격히 활발해진 2000년대 중후반쯤이라고 추정한다. 특히 온라인 교류의 끝판왕인 페이스북이 탄생한 시기가 2008년이니, 웃픔 바이러스가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진 시점을 그때쯤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물론 그것의 탄생 자체는 더 앞섰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2008년에 1집 앨범을 낸 브로콜리너마저의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에서는 웃픈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 좀 줄일 수 없냐고
네 그러면 차라리 나갈게요
그래 알고 있어 한심한 걸
걱정 끼치는 건 나도 참 싫어서
슬픈 노랠 부르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너의 목소리에
믿을 수도 없는 꿈을 꿔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 |
||
| ▲ 브로콜리너마저 1집 앨범 <보편적인 노래> | ||
우리의 화자는 “시끄러우니 소리 좀 줄여달라.”는 친구의 말에 화를 내며 적반하장 따지거나, 친구의 말에 따르며 의기소침해하지 않는다. 그 대신 헤드폰을 쓰고(아마 볼륨은 최대로 높였을 테다) 방 한구석에서 춤을 춘다. 참으로 ‘웃픈’ 모습이다.
내일은 출근해야 하고
주변의 이웃들은 자야 할 시간
벽을 쳤다간 아플 테고
갑자기 떠나버릴 자신도 없어
(…)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이어지는 2절 또한 웃음이 나오기는 마찬가지다. 먹고 살기 위해서 출근은 해야 하고, 이웃을 배려해야 하고, 아픈 건 싫고, 훌쩍 떠날 자신은 또 없다. 참으로 애매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화자를 탓할 수는 없다. 그/그녀의 행동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어 끙끙거리는 모습은 슬프지만, 결국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끼고 춤을 추는 모습은 웃기다. 남을 배려하기는 해야 하는데 자신의 욕망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어 홀로 춤을 추는 우리의 화자. 그리하여 우리의 청춘은 진실로 ‘웃픈’ 것이다.
‘왜 청년들은 분노하지 않느냐?’는 물음은 청년에게 적당하지 않다. 우리는 분노 대신 순종하는 방법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 보자. ‘왜 웃어 넘기지 않는가?’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Why so serious?”라고 배트맨에게 되묻는 장면 그대로가 바로 청춘의 모습이다. 그러니 웃퍼하는 청년을 너무 탓하지 말기를, 그리고 웃는 모습 속에서 슬픔을 발견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