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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 포스터 | ||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2010, 마이크 리)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계절은 이 네 가지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냥, 사계(四季)의 풍경을 그린다. 맑은 햇살이 창문 틈에 스며드는 봄의 모습. 찝찝한 땀이 흥건해도 반가이 껴안는 촉감이 좋은 여름. 서늘한 바람이 마음 속을 파고드는 가을. 사그라진 땅 위의 많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체온을 그리워하는 겨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스크린 속 배경은 우리가 가진 계절의 관념을 정확히 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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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봄처럼 포근한 톰과 제리 부부 | ||
Spring(봄)이란 자막이 흘러가고, 영화는 봄의 형상을 지닌 따뜻한 배경을 환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마치 삶을 일구듯이 밭을 가꾸는 톰과 제리 부부의 모습이 비춰진다. 함께 움직이고, 음식을 하고, 대화하는 그들의 모습은 육체의 시듦이 무색하게도 명백히 봄처럼 화사하다. 그리고 이와 대척점에 자리한 마냥, 그 봄의 형상 옆에 앉아서 수다스럽게 와인을 마셔대는 중년 여인, 메리는 과거에 만났던 남자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스스로를 ‘멋진 아가씨’라고 표현하며 영광스럽고 아름다웠던 과거에 갇혀있다. 자신은 이미 늙었고, 더욱 늙어갈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마냥, 멋진 남성에게 계속 눈빛을 보내고 지하철에서 날아온 추파에 근심한다. 돌아갈 집의 안온함과 가족의 포근함이 없는 메리의 외로움은 멋진 남자와 함께 할 언젠가의 봄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그녀는 현재 추운 ‘겨울’의 형상이다.
겨울은 아이러니의 계절이라고 노드롭 프라이는 말한다. 인생에서 겨울인 시듦의 시기에 환기되는 아이러니는 늙어가는 육체에 발 맞춰 따라가지 못한 젊은 정신의 상이함이 불러온다. 실제로 내가 바라보는 나의 세상과 남이 나를 바라볼 때의 시선이 다른 선 위에 존재한다면 내가 뿌린 시선은 가닿을 곳 없이 영원히 허공을 부유하는 외로움이 된다.
외로움에 대항하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방어기제는 ‘외롭지 않던 시절의 나’를 상기하며 그 시절로 퇴행하는 것이다. 메리는 비록 늙고 돈도 없는 싱글녀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스스로 젊고 아름다웠던 과거를 생각하며 제리의 아들 조이에게 추파를 던진다. 그들은 비록 20년 동안 알아온 사이였지만 메리는 ‘이모’라고 불리는 걸 거부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그의 눈을 바라보길 시도한다. 그리고 마치 20년 전 그녀가 이성에게 했을 만한 태도로 “언제 술 한 잔 하자”며 유혹한다. 이 행동은 단순히 그녀가 철이 덜 들어서라거나, 남성 편력이 있는 여성이기에 시행되는 것은 아니다. 쓸쓸한 집 안에서 아침에 홀로 외로이 깨어나는 아픔에 대한 거부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그녀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은 단지 ‘주책바가지 늙은이’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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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조이에게 추파를 던지는 메리 | ||
늙어간다는 건 과거의 타성에 젖은 여러 행동들이 이제 더 이상 내 몸에 맞지 않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실감이 간다. Summer(여름)의 풍경 가운데 톰과 제리 부부의 옆에 앉아, “요즘 술집은 괴성을 질러대는 애들로 꽉 차있지”라고 구시렁 불평하는 켄. 그런 그에게 톰은 “너도 젊은 땐 그랬어”라며 타박한다. 이처럼 과거엔 열정으로 기억되던 여름 공기의 끈적함이 어느새 찝찝한 불평으로 변하게 되는 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딘가를 향하던 열정을 상실함과 겹쳐진다.
늙어가는 이들에게 열정이 사라지는 까닭은 아마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언젠가 내게도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리라. 이것은 혼자라서 외롭다는 말이나, 과거가 그립다는 말보다 더욱 현실로 다가오는 날카로움이었다. 그동안의 많은 행위에 대한 의미의 상실, 그 까닭으로 요즘 사는 게 엉망이라던 켄에게 톰이 “가을엔 떠나자”고 제안하는 것은 친구사이에 막연히 약속하는 계획이 아니다. 이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노인의 미래에 하나의 이정표로써 존재하는 희망이었고, 방향의 설정으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마당 파티에서 이제 막 새로운 생을 시작하는 갓난쟁이와 미래가 창창한 30대 청년, 봄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노년 부부의 근처에서 처연한 한기를 내뿜는 켄, 메리의 모습은 극적으로 찌그러지고 초라해진다.
Autumn(가을), 모든 것이 익어가고 결실을 맺는 계절. 톰과 제리 부부의 토마토와 호박도 알맞게 익었고, 아들 로이의 사랑도 붉게 물들었다. 다만 시들어가는 육체에 발맞추지 못한 젊은 정신의 메리는 그의 사랑에 늙은 자신을 경험하고 상처 입는다. 이 대목에서 그녀의 상황은 자신의 중고차로 은유된다. 누가 봐도 올드한 연식, 후진 디자인에, 구매비용보다 유지비용이 더 많이 드는 빨간 자동차를 마치 어마어마한 행운으로 인식하는 메리. 이는 여자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로이다. 아무도 관심없는 차를 누군가가 훔쳐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마는 자기애는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한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이 젊었었던, 이 빨간 자동차가 신차였던 20년 전으로 향해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우아한 척 주차되어있던 이 자동차는 결국 고장 난 엔진에 멈춰 서서 옆을 쌩하니 지나가는 차의 뒤꽁무니만을 바라보고 질투한다. 조만간 폐차될 운명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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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겨울의 풍경을 공유하는 제리와 로니 | ||
Winter(겨울). 한 사람이 현실의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땅으로 돌아갔다. 아내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톰의 형, 로니는 아들에게도 외면 받고 쓸쓸히 톰의 집에 머무른다. 그의 심경은 날아가는 담배 연기에 투영되어 자유를 갈망하지만,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늙은 육체는 정지를 강요한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없는 방 안과 한 몸인 듯 멈춰있다. 하지만 그의 정지는 늙은 몸의 강요를 거부하고 추위를 헤친 메리가 톰의 집을 방문하면서 깨어진다. 두 외로운 몸뚱이는 따뜻한 차 한 잔으로 감정을 공유한다. 말 없고 무뚝뚝한 로니가 메리와 마주 앉는 것은 살가운 그녀의 태도 탓이 아닌, 그녀에게 풍기는 외로운 분위기 탓이다. 그들은 말한다. “대화 상대가 있는 것은 축복이죠.” 의미 없는 말만을 주고받던 그들의 대화는 간만의 대화 상대에 대한 기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쁨은 잠시의 행운처럼 흘러가고, 이내 집에 도착한 톰 부부와 로이 커플의 따뜻한 분위기에 압도된 메리와 로니는 카메라 안에서 투샷으로 고정된다. 그들을 비추는 프레임 밖에서 날아다니는 대화는 프레임 안으로 스며들지 않는다. 동시에 로니와의 축복스런 대화가 단절된 메리는 또다시 카메라 안에 홀로 남는다. 외로운 눈빛의 그녀는 조금씩 소외된다. 여기서 암전되는 그녀의 모습은 깜깜한 공간 가운데 아무도 없는 막막한 외로움을 소묘한다. 메리는 외롭다. 동시에 과거의 젊음이 그립다. 그러므로 그녀는 겨울을 살아가는 늙은이임을 인지한다. 따라서 미래는 조금 더 어두워진다.
<세상의 모든 계절>이 소묘하는 사계의 모습이 봄에 시작해서 겨울로 끝맺는 것은 다시 올 봄에 대한 희망의 암시일까 아니면 쇠락 후에 다시는 만개가 찾아오지 않는 인간 육체에 대한 비탄의 의미일까. 굳어가는 메리의 표정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