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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시체보다 배고픈 주체가 되기 위한 축축한 걸음 <인사이드 르윈>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인사이드 르윈>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사이드 르윈>(2013, 조엘 코엔/에단 코엔)

“지쳐 죽을 것 같아. 하룻밤 잘 자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

<인사이드 르윈>의 주인공 르윈 데이비스는 공연을 하라는 진의 제안에 이처럼 말한다. 실제로 스크린 안에서 펼쳐지는 그의 삶은 지쳐 보이기 그지없다. 추운 겨울 거리를 걷는 몸뚱이에 걸쳐진 코트 따위는 없고, 매일 밤을 다른 사람 집 거실의 소파에서 지새며, 멀리 떨어진 시카고에서 본 오디션의 결과도 좋지 않다. 암울한 생활의 연속. 모든 것을 다 잊고 잠을 자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가 않다. 그는 계속 걷고 또 걷는다. 발길의 정처는 어디에도 없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오프닝. “난 죽어 사라지겠지. 날 매달아주오.” 하며 목 놓아 외치는 노래를 부르는 르윈의 모습은 핀 조명으로 집중된다. 그는 밝게 빛나고 있지만 주위는 ‘지쳐 죽을 것’ 같은 그의 심경과 겹쳐지는 듯이 어둡다. 이내 노래 한 곡을 마치고 무대 밖으로 내려온 르윈을 기다리는 건 다짜고짜 그의 얼굴을 향해 달려드는 매서운 주먹이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질문처럼 던져지는 의문은 왜 ‘르윈은 변변찮은 반격도 한 번하지 못하고 얻어맞기 바쁜가’에서 시작한다. 마치 자신을 향한 폭력이 무슨 정당한 이유라도 있는 것 마냥, 그는 ‘내 일이 그렇잖아요’ 하며 변명만 급급하다. 자신이 일이라고 외치는 것에 대한 익명의 남자의 폭력, 그로부터 되돌아오는 “일 좋아하시네” 하는 익명의 남성의 조롱 섞인 독백은 르윈으로 하여금 자신과 내면(inside)에 대한 자조를 강요한다.

갑작스런 폭력에 쓰러진 르윈은 그의 은사인 골페인 교수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그의 가슴팍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건, 고양이 한 마리. 방해 없는 깊은 잠을 갈망하는 르윈의 눈초리엔 고양이를 향한 원망이 섞여있지만 뜨인 눈을 다시 감지는 않는다. 이처럼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잠에서 깨어난 르윈의 모습은 확고한 목적이나 계획 없이 타의로 세상에 내던져진 많은 젊은이들의 형상을 띤다. 그 형상의 원인은 바로 직전의 시퀀스에서 익명의 남자에게 조롱당한 자신의 ‘일’에 관한 확신의 부재. 이때에 가슴에 올라있는 고양이의 무게는 그가 지닌 삶의 무게와 같다. 이 상황에서 길을 걷는 젊은이는 언제나 올곧은 길의 주변만을 부유하듯 배회할 뿐이다. 따라서 르윈은 영화 내내 고양이와 스스로의 불확실한 자아를 찾기 위한 여정을 함께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르윈의 여정은 사실 굉장히 단순하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서 오디션이 있는 시카고까지 갔다가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것. 일종의 로드무비 서사를 따르고 있는 그 짧은 과정 가운데에서 르윈은 자신과 함께하는 고양이의 이름을 호명치 못한다. 이는 주체성을 상실한 그의 이름이 타인에게 ‘고양이의 이름 혹은 엘윈 혹은 르. N. 데이비스’ 등으로 오해되며 쉽게 가 닿지 못함과 같다. 그러므로 르윈에게 고양이는 곧 삶의 무게이자, 이름을 상실한 이로서 동질감을 갖는 존재로 그려진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지금의 무일푼의 삶과 남의 소파를 전전하는 삶을 청산하기 위해, 르윈은 유명 음악 프로듀서 ‘버드 그로스만’의 오디션에 참가하기 위해 시카고로 떠난다. 시카고로 가는 차 안, 르윈은 귀는 열고 있지만 입은 닫은 ‘조니’와 귀는 닫고 입만 열고 있는 ‘롤랜드’와 동행한다. 어느 쪽이든 일방향적인 대화만 가능한 이들과 일방향의 여행을 가는 르윈은 차창밖을 빠르게 지나는 풍경과 다르게 차 안에 편안히도 고정된다. 외부와 차단된 내부, 거기서 진행되는 지극히 일방향적인 두 대화. 르윈은 그제서야 외부의 압박에 자유로운 주체가 된다. 재롱잔치와 같은 연주는 하지 않겠다던 그가 조수석에 앉아 재롱을 떨고,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과거의 파트너 ‘마이크’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며 스스로의 트라우마와 대면한다. 그렇게 그는 그동안 계속 거부해왔던 내면을 향한 방향을 설정한다. 타인의 도움으로 설정한 방향, 르윈은 그 뒤, 차에서 내려 스스로 걷기를 결정한다. 고양이로 상징되는 자신의 삶에서 그간 짐이었던 모든 무게를 내려놓고서, 기타 하나만 메고 눈길을 걷는다.

물론 그 뒤 르윈의 행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쉽지 않다. 야심차게 참가한 오디션에선 ‘메인 보컬 감은 아니다’는 평가를 듣고 뛰쳐나오며, 어린 시절 르윈의 노래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몸과 정신이 성치 않은 아버지는 노래에 대한 평가로 앉은 자리에서 똥을 싼다. 이런 싸늘한 평가를 뒤로하고 르윈은 계속해서 또 눈길을 걷는다. 그는 끊임없이 축축한 길을 걷는다. 점점 신발과 양말이 젖어가지만 그에게는 신발과 양말을 말릴 집이 없다. 그래서 그는 신발과 양말을 말릴 수 있는 집을 위해 꿈을 포기하고 배를 탈 준비를 한다. 무거운 꿈이란 짐보단 현실 속 자신의 안위가 들고 다니기엔 더 가벼웠기에.

영화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갈 즈음, 갈 곳이 없어진 르윈은 골페인 교수의 집으로 향한다. 골페인 교수의 고양이를 잃어버리고, 그의 아내에게 막말을 해버린 르윈은 골페인 부부에게 있어서 죄인과 다름없지만, 그들은 갈 곳이 없는 르윈을 따스히 맞아준다. “며칠이나 머물건가?” 하는 그의 말에서 느껴지다시피 그것은 아마 그가 잠깐 머물다 떠날 ‘손님’이기에 가능한 일. 온갖 가식이 뒤섞인 그 집 안에서 르윈은 자신이 잃어버렸던 고양이를 발견한다. 마치 예전의 우화처럼 길을 돌아 결국은 집에 돌아온 고양이를 골페인 교수는 대견하다는 듯이 자랑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영화의 오프닝 때처럼 르윈은 고양이의 강요로 잠에서 깨어난다. 이는 그러나 오프닝과는 전혀 다르다. 고양이에겐 이제 르윈에게 없는 집이 있고 이름도 있다. 그러므로 클로즈업되는 고양이의 모습은 마치 그를 조롱하듯 입맛을 다신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인사이드 르윈>의 엔딩. 오프닝과 같은 장면이 흐르고, 한 곡으로 그쳤던 오프닝과는 다르게 르윈은 두 번째 곡을 시작한다. ‘날개가 있다면 강을 날아 사랑하는 이에게 갈 텐데’하는 가사로 시작하는 새로운 노래는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고픈 스스로의 심정을 대변한다.

자신의 선택인 음악을 포기하고 배를 타려했던 그가 느낀 스스로의 미래는 병원에 조용히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향한다. 과거에 그 모습은 안정적이고 부유했으나, 자신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가족 혹은 타의로 이끌려 다닌 채 ‘시체’처럼 살았고, 결국 현재는 똥을 싸는 것까지 자의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 그가 막연히 떠올린 미래는 그 모습과 같아보였으리라. 그러나 ‘시체’가 되길 거부하고 돌아온 현실은 여전히 배가 고프고, 소파를 전전하는 삶이다. 그렇기에 결국 그는 오프닝과 똑같은 형태로 폭력의 객체가 된다. 하지만 이제 폭력을 휘두르는 그 남자는 의문 속에 가려져 있지 않고 정체가 명확하다. 비록 르윈은 계속 변명에 바쁘고 맞기 바쁘지만 말이다.

르윈을 때리고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사라지던 오프닝과는 다르게 명확하게 그 남자를 바라보는 르윈의 변화는 서사 가운데에 진행된 르윈의 자아탐구와 관련이 있다. 그는 영화 속의 여정을 통해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앨범에 속한 모든 곡의 연주를 마쳤다. 이젠 공고한 자신의 모습을 외부로 발산할 앨범을 향한 걸음을 시작할 차례다. 비록 수미상관의 폐곡선 형태를 지닌 영화는 앞으로 계속해서 반복될 르윈의 추잡한 인생을 소묘하지만 그 가운데에 일어날 약간의 변화는 결국 그의 완전한 앨범을 기대하게 한다. 따라서 나는 다시 돌아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 아닌 ‘르윈 데이비스’로 살아갈 그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

‘오르부아! 르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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