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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음의 허공으로부터 시도하는 인간의 도주 <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다>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신동혁]***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다> (2013, 파벨 포리코브스키)

그 날의 하늘은 마치 구멍이라도 난 듯 눈이 쏟아져 내렸고, 그 눈은 하늘의 축복마냥 그녀의 머리에 가 소복하게 손을 얹어 주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철창 안에서 남들과 고립된 곳에 살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오로지 ‘주’라고 불리는 이를 쫓았으며 매일같이 그의 말씀을 탐독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모든 감정과 감각을 통제한 채 선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녀의 세상은 언제나 희거나 검었다.

안온한 ‘주’의 세계에 거주하는 안나의 일상은 아늑하였지만 지루하였고, 한갓지게 심심했다. 마치 아무런 위협과 모험이 존재하지 않는 에덴에서의 하와가 그랬듯이 안나는 잔잔한 호수처럼 다소곳했다. 그러한 삶에 투영된 그녀의 모습은 마치 ‘순종’과 ‘평강’만을 가리키는 외로이 우뚝 선 표지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호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기에, ‘안나’가 자신의 주인 된 종교와의 관계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어 그 안온한 세상과는 상반되는 음험하고 은밀한 세속 세계와의 관계를 형성할 때, 그녀는 이전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새로운 이름으로 호명된다.

‘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이다’라는 이름으로 그녀가 처음으로 마주한 것은 부모에 대한 진실이다. 자신의 이모 ‘완다’와의 여행을 통해 통제에서 벗어나 실제적인 부모를 탐구하는 과정은 마치 속계의 유혹을 바라보는 성녀처럼 그려지며 순수와 욕망의 대면을 함의한다.

여행 가운데, ‘예쁘다’는 완다의 칭찬에 이다는 말없이 미소 짓는다.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은 통제되지 않는 본능처럼 꽉 막힌 밀실을 비집고 나와 흐르듯 분출된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다. 아마도 흑과 백이 서로에게 자신의 모습을 강요하다 결국은 회색이 되듯, 그것은 ‘신’으로부터 통제와 여성으로서 본능적으로 지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서로의 몸을 탐닉하고 뒤섞는 과정에서 드러난 갈등이며 좌절이다. 그런 이다의 황망한 모습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워대는 완다의 모습은 유한한 삶의 관점에서 삶의 무한함을 우러르는 한 인간의 무지함을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그녀의 칭찬은 젊은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라는 표층적 의미가 무색하게도 다분히 나르시시즘적이며, 에덴에서 하와의 무지함을 조롱했던 뱀의 유혹과 같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순수의 본질은 아침 이슬처럼 소멸까지 정갈함이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사실 무지로부터 비롯됐으며 언제고 바닥에 쌓인 눈처럼 더럽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자살하는 완다.

완다가 이다에게 전하는 “해보지도 않고 희생을 맹세하면 무슨 의미야?”라는 말은 꼭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세기 3:5)라는 뱀이 하와에게 전하는 달콤한 유혹의 메시지처럼, 순수를 욕망으로 이끈다. 그리고 그 욕망이 베어 문 ‘앎’의 쾌락은 순종의 허무함으로 변모하고 결국 신에 대한 반역으로 이어진다. 이다가 신봉했던 무한함에 대한 실체는 백골이 된 부모님을 목격하며 의심으로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그런 이다의 신에 대한 의심증은 곧이어 온 완다의 죽음으로 온전히 그녀만의 관념으로 정착한다. 타락. 그것은 단순한 욕망의 발산과 해소가 아닌, 이성이 목격한 덧없음의 허공으로부터 시도하는 인간의 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자신의 벌거벗음을 나뭇잎으로 가려버린 하와처럼, 욕망이란 선악과를 먹은 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정복(正服)의 감금을 벗어던지고 아름다운 나체로써, 그리고 새로 선 구두의 굽만큼 높아진 자존감으로써 세상과 대면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욕망에 눈을 뜬 이다.

그러나 에덴 안에서 하와가 바라보았던 욕망의 삶은 실제로 그녀가 경험하는 욕망이 지배하는 삶과 적확히도 달랐다. 상상계의 영역에서 기어 나와 상징계의 영역으로 편입한 그녀의 삶은 영원한 쾌락보단 무한의 고통과 죽음으로 귀결했다. 그리고 하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이다 역시도 그녀가 마주한 세상에서 경험하는 욕망과 쾌락은 성경 뒤에서 훔쳐보듯 바라봤던 그 즐거움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신을 쾌락으로 안아주던 시몬에게 계속해서 “그 다음은?”이라며 질문한다. 이는 물음의 기저에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어떻게든 채우고자하는, 욕망에 대한 집착과 간절함이 담겨있다. 결국 마지막 물음의 대답을 듣지 못하며 이다가 목격하는 건 이전과는 또 다른 차원의 덧없음이다. 그것은 욕망의 덧없음. 욕망과 쾌락의 즐거움은 강렬하지만 유한하다. 언젠간 결국 마지막엔 죽음이 기다리는 그런 인간의 삶. 무한의 안락과 비하면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는 욕망의 현신인 검정드레스를 벗고 다시 수녀의 정복으로 회귀를 시도한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세상은 ‘빛이 있으라’는 강렬한 따스함을 기원에 두고 있다. 인간이 눈을 감는다는 건 하나님이 창조한 따스함과 포근함에 경이를 표하는 것이며, 그 감았던 눈을 뜬다는 건 아름다움을 목격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기인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다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름다움을 완상하려 뜨여진 자신의 눈에 대해 다시 감기를 시도한다. 아름다움을 탐닉했던 눈을 감은 채 다시금 창조주의 포근함을 느끼는 것, 그건 바로 신께 기도하는 것. 그러므로 그녀의 믿음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더불어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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