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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얽매인 이들의 상처 : <동사서독>

   
©네이버 영화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취한 듯이 볼 때가 제격이다. 하지만 왕가위 감독이 단순히 비주얼리스트에만 그쳤다면, 그의 작품은 영화계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가위의 영화에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영화가 각광받는 이유는 말하고 싶은 것을 그만의 독특한 영상으로 호소력 있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취한 듯 볼 수 있고, 오랜 기억이 떠오르듯 다시 곱씹게 만드는 매력. 그것이 왕가위 표 영화의 매력이다.

 <동사서독>은 왕가위 영화답게(!) 스토리는 거의 없다. 정확히 말하면 <동사서독>은 무협의 탈을 쓴,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관객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머지 흥행 참패도 겪었다. 왕가위 감독은 강호의 세계와 무협 고수들의 결투가 있을 것이라는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고 과감하게 자신만의 색을 덧입혀 냈다. 이야기는 이렇다. 백타산에 사는 주인공 구양봉은 자신이 살던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서 여관을 차리고 살인 청부업을 중개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구양봉은 오고 가는 의뢰인들의 사연을 듣게 된다.

과거의 상처에 매달리는 사람들

 구양봉을 찾아온 의뢰인들은 대개 과거의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다. 구양봉을 처음 찾아온 의뢰인 모용언은 자신에게 사랑을 약속했으나 그 기억을 잃은 황약사를 잊지 못한다. 그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모용언은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을 동시에 품게 된다. 그렇게 그녀의 인격은 분열되고, 그녀는 구양봉에게 모용연이라는 남자와 모용언이라는 여자의 모습으로 번갈아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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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용연은 본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 황약사를, 모용언은 황약사를 증오하는 모용연을 죽여달라 청한다. 황약사를 증오하는 인격인 모용연을 죽여달라고 한 것은 결국 황약사를 사랑했던 마음이 더 컸던 탓이었을까. 그녀를 보며 어찌된 일인지 냉정한 구양봉은 잠시나마 황약사 행세를 하며 그녀를 위로해주고, 모용언은 그를 떠나 무림의 고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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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의뢰인은 맹무살수라는 맹인 검객이다. 그의 아내는 황약사와 불륜을 저질렀다. 맹무살수는 고향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 노잣돈이 필요하다며 찾아온다. 그러나 그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눈이 멀어가는 상황임에도 자청하여 무리한 임무를 맡는다.

 모용언과 달리 맹무살수는 사랑의 상처 앞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사람이다. 그는 사랑을 다시 시작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는 아내에게 돌아간다 해도, 아내가 자신을 다시 사랑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구양봉과의 마지막 술자리에서 황약사에게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달라는 그의 말이 이를 증명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맹무살수는 결국 죽고, 그를 구양봉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러나 구양봉에게 맹무살수의 사연은 마냥 남의 일 같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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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다른 의뢰인은 젊은 여자와 홍칠공이다. 홍칠공은 지금까지의 의뢰인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 선다. 구양봉은 홍칠공을 보며 자신과 다른 그의 모습을 자기 자신과 비교하게 된다. 지금의 구양봉은 이해타산에 능하고 자신이 손해볼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칠공은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여준다. 앞서 구양봉을 찾아왔지만 돈이 없어 누구에게도 복수를 의뢰하지 못한 여자의 부탁을 겨우 계란 한 개로 들어준 것. 구양봉은 그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홍칠공은 결코 당신 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또 한 가지. 홍칠공은 구양봉과는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한다. 사막 저 너머를 궁금해하는 홍칠공과는 달리 구양봉은 가 봐야 아무것도 없다고 자조한다. 그러나 홍칠공은 구양봉과는 다르게 사막 너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른 곳으로 떠난다.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떠나는 홍칠공을 보며 질투를 느끼는 구양봉은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 그는 곁에 없었어요.

사실 구양봉 역시 지나온 과거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인 자애인이 있었다. 무사의 길을 걷는답시고 매번 자신을 떠나는 그에게 기다림에 지친 자애인은 보란 듯이 그의 형과 결혼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이겼노라고 자부했다. 형과의 결혼 소식을 듣고 찾아와 지금이라도 함께 떠나자는 그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 이후에도 구양봉은 자애인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한다. 그녀의 전략은 성공한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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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사랑에서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애인은 너무 늦게 깨달아 버렸다. 진정으로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와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구양봉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자애인의 승리는 상처뿐인 승리였다. 그녀의 선택은 이제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결국 자애인은 하루하루 병들어 가고, 구양봉을 그리워하다 죽음을 맞는다. 자애인과 구양봉이야말로 의뢰인들만큼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그 소식을 듣고 나서야 구양봉은 지금껏 과거에 얽매여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막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구양봉의 대사가 이를 말해준다. 가질 수 없었기에 잊으려 해도 선명해지는 과거. 그러한 과거일수록 미련도 커지는 법이다. 그는 언제나 자애인과 함께였던 백타산에서의 추억만을 그리워할 뿐, 현재의 사막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서야 구양봉은 사막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비록 그녀와의 추억을 잊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는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기억을 잊을 수 없다면 적어도 아름답게 남겨둘 수는 있지 않겠는가. 결국 그는 불을 지르고 사막을 떠나간다.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었던 과거를 뒤로 한 새로운 출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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