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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
[디아티스트 매거진=신동혁] ***스포가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알랭 레네, 2012)
앙뜨완이 죽었다. 그리고 그의 향기가 서려있는 대저택으로, 그의 기억을 품고 있는 13명의 배우가 초대되었다. 성별과 나이는 천차만별이지만 그들 손끝에 맺힌 감각의 기억은 앙뜨완이 연출한 연극 ‘에우리디스’(오르페우스 신화의 변주)로 이어진다.
영화의 오프닝. 연극 연출가 앙뜨완의 부고가 13명의 배우들에게 각각 전해진다. 어두운 배경, 그 가운데 환한 핀 조명을 받는 배우들. 지독한 어둠 속으로 시선을 보내던 그들은 고독한 영광의 광명에서 기어 나와 다른 배우들과 만남의 무대로, 관계 속으로 입장 했다. 그 입장을 재촉이라도 하는 듯이 창 밖에선 거센 바람이 휘날렸고, 그 재촉에 그들은 각기 다른 시간이 흘러버린 연극 ‘에우리디스’ 속으로 빠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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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앙뜨완의 저택으로 입장하는 배우들 | ||
그들은 앙뜨완과 함께 아주 먼 과거 에우리디스 속에 살았던 주역들이다. 누군가는 오르페우스로, 오르페우스의 아버지로, 에우리디스로, 그녀의 어머니로……. 그 꾸며진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서로 뜨거운 연인이었으며 증오의 존재이기도 했고, 연민의 존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연극 속에서 빠져나온 현실의 그들은 서로 기억 속 멀어진 존재에 불과 했으며, 그 과거의 기억은 오랜 시간동안 잊혀진 채, 기억 속에 파편화 되어버린 편린으로 남아버렸다.
그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야속함 속에서 앙뜨완은 여러 관계들과의 이별로 너무나 거대한 저택 크기만큼의 공허함을 느꼈다. 늙어가는 몸뚱이, 화려했던 과거. 그런 그의 현실에 다시금 의욕과 활기를 가져다 준 것은 ‘콤파니 드 라 콜롬보’의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 영상이었다. 비록 그것은 그가 연출했던 연극과는 전혀 상반되는 후줄근함과 추잡함이 가득했지만, 앙뜨완 그가 지녔었던 젊음의 패기와 미숙하지만 살아있는 열정이 다시금 그의 공허를 메웠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스가 거니는 풍경 속에서 앙뜨완 자신과 예전에 함께한 13인의 배우들이 걸었던 기억의 자리를 보았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추억의 공유를 위해, 다시금 젊은 날로의 회귀를 위해 13인의 친구들에게 부고를 보낸다.
‘늙은 앙뜨완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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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콤파니 드 라 콜롬보의 연극 ‘에우리디스’를 감상하는 배우들 | ||
그들이 공유하는 연극 ‘에우리디스’는 계속된 좌절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 그 사이에서 에우리디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마티아스는 무거운 기차 위로 투신했고, 에우리디스 본인도 오르페우스와의 사랑을 뒤로 한 채 새로운 시작을 꿈꾸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도 죽음의 문턱에서 에우리디스를 다시 만났을 때, 그녀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다가 죽음과의 약속을 어겨 다시 한 번 그녀를 완전한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죽음의 내용을 가진 연극의 주체였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연극의 관객이 된 13인의 배우들은 과거의 기억을 거슬러 화면과 공존하며, 무대 밖에서 연극을 다시 시작한다. 화면 속 젊은이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와 화면 밖 늙어버린 과거의 영광들이 연기하는 ‘에우리디스’ 그 두 세계의 배치는 결국 세계의 혼합으로 다가오며, 현실과 가상 두 기준이 무의미해지는 붕괴가 일어난다. 그리고 이 붕괴는 결국 배우들 현실의 본연과 무대 위 배역, 두 자아의 감정과 기억 공유를 이끌어낸다. 그렇게 그들은 첫 사랑을 다시 한 번 만나는 듯, 스스로의 과거를 탐색하는 듯한 설레는 감정으로 연극을 이어가고 과거의 젊음을 다시금 느끼며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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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연극 속에 빠져드는 과거의 에우리디스와 오르페우스 | ||
하지만 그 설렘 가운데 이 영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죽음’의 형태는 등장인물들에게 익숙함이란 오랜 감정과 함께 낯섦이란 새로운 감정을 동시에 환기한다. 연극 ‘에우리디스’에서 나타나는 여러 인물들의 극적 죽음과 연출가 앙뜨완이 꾸며낸 현실적 죽음. 이 두 가지의 죽음을 모두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13인의 배우들에게 ‘죽음’이란 이미 과거에 ‘에우리디스’ 속에서 연기한 익숙한 것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그들이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현실 속 앙뜨완의 죽음은 그 보편적인 현상에서 현실을 중첩시켜 놓음으로써 죽음이란 실재계의 영역을 낯설게 만들었다. 프로이트가 언캐니(Uncanny)라고 명명했던 이 낯익지만 낯선 정서는 언젠가 ‘내 것’이 될지 모르는 걱정에 진정한 공포로 다가온다. 그렇게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는 그들은 멍하니 화면 앞에 앉아있고, 그 속에 존재하는 각자 자신들의 흔적을 따라가며 캐릭터의 감정에 극한으로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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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추억을 공유한 앙뜨완과 ‘에우리디스’의 주역들의 만남. | ||
하지만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던 그들에게 ‘극중극’ 형태는 곧 구원으로 다가온다. 이윽고 ‘에우리디스’는 막을 내리고, 이어 죽은 줄로 알았던 갑작스런 앙뜨완의 등장. 극에 집중하던 13인의 배우들에게 다가왔던 죽음의 현실이 내 경험과 기억 안에서 현실의 밖으로 밀려나는 구원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천천히 다가온 앙뜨완을 안았다. 그리고 더 이상 자신들과 상관없는 에우리디스 연극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자는 앙뜨완의 말에 동의한다. 죽음에 대해 내 것이었을 때와 내 것이 아닐 때의 이중적 태도. 그렇게 익숙한 낯섦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잊혀진다.
엔딩 시퀀스. 살 날이 아직 많이 남았다던 앙뜨완의 갑작스런 부고가 다시 전해지고, 그렇게 앙뜨완의 죽음은 연기에서 현실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의 다짐처럼 ‘에우리디스’는 다시금 무대에 오른다. 그 모습을 보는 13인의 배우들은 잊혀졌던 죽음에 대한 익숙한 낯섦을 다시금 경험한다. 검은 옷을 입고 눈물을 흘리는 묘지 앞 여인의 모습은 앙뜨완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눈물이었을까. 아니면 언젠간 앙뜨완과 같은 모습이 될 자신에 대한 연민과 두려움의 눈물이었을까.
그러나 무대에 오른 연극을 멀리서 바라봤을 때야 비로소 들리는 “이제야 당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냈소” 따위의 대사는 현실의 세계에서 익숙한 낯섦이 가져온 영원한 사라짐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내리진 위로의 손길로 작동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연극 ‘에우리디스’가 극작가 앙뜨완 그리고 13인의 배우들의 손길이 닿아있는 세계로써 그들이 남겨두었던 무대 위의 흔적은 지속되기에, 위 대사는 영원한 사라짐(이라고 여겨지는 ‘죽음’ 따위)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당부의 외침은 아닐까. 그러므로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죽음의 공간으로 가서 에우리디스를 만나는 오르페우스처럼, 현실의 세계에서 이미 사라진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기억의 장소로 걸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의 만남으로, ‘당신의 흔적도 누군가에 의해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알랭 레네의 안온한 포옹과 같은 메시지로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