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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슬로, 8월 31일 [Naver 영화] | ||
[디아티스트매거진=권용민] 오슬로 8월 31일 첫 시퀀스, 이사 후 첫 오슬로로부터 전해 받은 첫 느낌을 아늑한 추억에 겨워 회상하듯 들려준다. 누구나 한 번쯤 거주지를 옮겨 본 경험이 있지 않나. 최초의 시작점이 아닌 이후의 시작점에 관한 느낌들, 최초의 시작점은 무척이나 까마득하여 짤막한 ‘처음’만이 갖는 매혹적인 마력을 자연스레 익숙함에게 물려주고 마니, 태생지만이 갖는 억울하다면 억울한 푸념거리가 되겠지. 누구나 한 번쯤으로 운을 떼었으니 나 역시도 이후의 시작점에 관한 아늑함이 있다. 어떤 이는 몇 번이고 거주지를 옮겼을지 모르겠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듯 반복에 생기가 닳는 것은 당연하고 나 또한 거듭된 이삿길에 느낀 생소함은 오로지 처음 이삿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밀조밀 주택지에 엉켜 살던 어린 시절, 곧게 뻗은 층층의 건물에 눈을 두고 벙 쪄 있더랬지. 텅 빈 공간에 하얀 지점토를 덕지덕지 발라가며 놀던, 어찌 보면 무척이나 사소한 것이 수많은 것을 밀어내고 기억 한구석에 자리를 피게 됐는지 의아하나 이 영화의 첫 시퀀스가 그 기억을 들추었으니, 이 글을 쓴 계기가 되었다면 그런대로 족하겠다.
1. ‘처음’이란 생소함과 설레임이여
일요일 석양 무렵에 오슬로로 운전하며 들어가던 기억, 북부 노르웨이에 비해 나무가 참 컸던 기억, 오슬로의 풍경이 아닌 주위 사람들에 대한 기억, 그리고 오슬로의 끝없는 길을 무작정 걸었던 기억들. 어떤 이는 그 시절에 대한 동경으로 혹은 철없던 아이의 풋풋함에 실소를 품기도 하며,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빌려 나레이션으로 흘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이 갖는 생소함과 설렘이 내겐 곧 잘 와 닿았다. 영화의 전반적 맥락을 설정하는 것에 있어서 초반부 시퀀스의 중요성을 따로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만큼 비중 있는 첫 시퀀스에 ‘처음’이 갖는 여러 감정들을 조망하니, 이 작품 속 ‘처음’이 갖는 무게는 꽤나 묵직하다. 그 때문에 이어진 시퀀스, 주인공이 주섬주섬 주운 조약돌을 옷가지 안에 채워 넣고 물속에 몸을 구겨 넣은 자살이 단지 잠수로서 그치게 되며, 왜 단지 잠수에 그치는가는 다음 장면 토마스와의 대화에 놓여있다. 우리는 그가 자살을 시도 한 것이 수차례였고, 스스로 헤로인 문제가 아님을 자각한 사실을 알게 된다. 더욱이 자살을 계획하기 전날 스웨덴계 여자와 재미를 본 것을, 그리고 그 재미란 것이 지루하고 별 볼일 없는 피곤만을 안겨준 짐 덩이였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으니. ‘처음’이 갖는 생기와 설렘, 생소함 그 모든 것이 그에게선 낯선 것이 된다. 그의 기대치는 항상 최초에 있으며 이후의 반복은 ‘지루하고 볼품없다’ 말한다. 그래서 무료하고 그는 자살을 시도한다. 그가 택한 자살이란 것이 죽음의 문턱을 딛고 돌아온 새로운 시작 즉, ‘처음’의 생기를 가져와 줄 의식과도 같은 것임을 역설로 보여주는 것이다. 측은하게도 그는 변함이 없다. 몇 번이고 자살을 할지 모르겠지.
2. 슬픔이 아닌 기쁨의 부재에서 느껴지는 우울함이란
앞서 주인공의 자살을 진지하게 보았던 까닭은 그가 최초, 처음을 욕망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허나 처음으로 돌아 갈 수 없음을 자신의 입으로 말하니, 더욱 씁쓸한 게다. 잠시 글의 방향을 돌려보자면, 오슬로 8월 31일을 본 후 그에 관한 몇 가지의 글을 읽었다. 대게 ‘마약중독자’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고, 마약중독자의 힘겨운 치료과정이니,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절함 혹은 중독자가 느끼는 사회적 거리감이라느니. 글의 동일점은 모두 ‘마약중독자’라는 사실에 집요한 포커스를 대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 영화가 갖는 특유의 우울한 분위기가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허나 내게 있어 작품이 남기는 우울함이란, ‘마약중독자’라는 사실과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글재주가 좋아 그가 기고한 기사는 훌륭하다는 평판을 받는 이 남자의 허물어짐에 묻어나오는 우울함이 아니란 말이다. 작품의 우울함은 그의 몰락에서 감지된 것이기 보다 그의 건조함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다. 슬픈 광경을 목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떠한 것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표정을 짓지 않는 사실에 있다. 그는 건조하다 그리고 무감각하다. 사이코드라마의 역할 분담 치료과정에서 무덤덤한 그의 태도를 보건데 치료과정 그 자체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중독에 못이기는 처절함을 보여주었다고?, 그런 자가 스스로 마약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공공연히 말하며, 그의 옛 여인과 하룻밤을 잤던 친구 또한 ‘넌 마약중독이 문제가 아니야. 네가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으며, 결과가 어땠는지 돌이켜 봐’라고 말하니. 중독의 처절함 역시 무색해지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가 느낀 ‘거리감’은 또 어떠한가. 토마스는 그의 거듭된 자살시도에 위로를 건네며, 나름의 방법으로 그의 연이은 자살극에 제동을 걸어 주었으니 이만하면 거리감 또한 별 설득력 없는 잡설에 불과하다. 그럼 마약이 그에게 가져다 준 재정적 궁핍함이 그의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재활원 속, 중독자랑 애를 낳고 창고에서 일을 하더라도 행복한 이들의 행복을 ‘과연 내가 느낄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이 그에게 더 큰 문제였으니 그것도 아니다. 그렇담 명망을 누리진 못하더라도 적정의 평판에 머문 그가 왜 헤로인을 손에 놓지 못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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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Naver 영화] | ||
3. 중독 그것은 강제적 반복이다.
자, 우린 최초를 욕망한다는 것과 그의 우울함이 비단 ‘마약중독자’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았고 왜 헤로인을 놓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만이 남았다. 그가 극에서 뱉은 말 중 실마리가 있겠지.
‘기대가 너무 컸나봐.’, ‘항상 끝은 같고 지겨워지지.’, ‘재활원에 있는 이들은 항상 행복해보여.’, ‘모두 다 잊혀지는 거야, 자연스러운 거지.’
그는 수를 세기도 벅찰 여인들의 품을 넘나들며 남은 것이라곤 유독 부산을 떨었던 이젤린의 옅은 흔적이었다. 고집스럽게 이젤린에게 메시지를 남기는 것 또한 그 맥락에 있다. 그가 유일하게 푹 빠졌던 여인, 유일하게 생기에 한 줌의 숨을 불어 넣어준 그가 바란 ‘최초’에 근접한 여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는 느긋하지 못하다. 그것이 단순히 부단하단 말보다 권태를 쉽게 느낀다는 것과 가깝다. 극의 중간 쯤 주인공은 북적되는 카페에 들어선다. 오가는 주위 대화에 귀를 기울이니 이 또한 ‘마약중독자’로서 느끼는 거리감이라 표현한 이들도 여럿 있었으나, 내가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은 그의 거리감 보단 타인의 일상에서 조차 그는 지루함을 느낀다는 데에 있다.
의미 없는 수다가 한창이다. 주인공 스스로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 말하니 무슨 이야기인들 시시하지 않겠냐마는 쓸데없는 말수가 맞다. 그 중 유독 그의 귀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이야기가 있으니 한 여인의 버킷리스트. ‘외국에서 살기, 표준 체중 달성 및 유지하기 훌륭한 소설 쓰기, 옛 친구들과 연락하며 살기, 나무 한 그루 기르기, 남은 재료로 맛있는 저녁 만들기. . . 탁트인 하늘 아래서 잠자기’ 한참을 길게 외던 이 부분이 참 묘하다. 여인의 버킷리스트와 트레이닝 복 차림 힘 빠진 걸음의 여인, 다시 한 번 여인의 버킷리스트를 들려주고 운동에 열중하는 여인, 그리고 또 버킷리스트, 이번엔 운동 후 장을 마친 여인의 한 숨. 버킷리스트와 일상의 연이은 교차 편집, 그 둘의 충돌을 박자를 맞추듯 일관되게 겹쳐 보여준다. 버킷리스트와 일상은 어쩌면 반대 선상에 등을 맞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을 집요하게 섞어 넣었으니 이 또한 의도한 것이 아니겠나. 그는 버킷리스트가 일상에 매몰되어 그저 희망사항으로 변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일상에 돌아가고픈 간절함 보단, 일상을 벗어날 그 ‘무엇’이 필요한 게다.
카페를 나온 후 그는 가족과 만난다. 가족은 일상의 최중심부와 같으나 그는 ‘그게 내 잘못이야?’, ‘내 문제는 나 때문이지 부모님과는 아무 상관없잖아.’라는 말로 스스로 담을 쌓는 모습에서 그가 일상과 만날 수 없는 평행선과 같은 존재임을 발견하고 만다. 가족이라는 이름하에 이토록 무감각해 질 수 있다니. 주인공이 헤로인에 손을 된 이유, 그것은 중독 때문이다.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다시 말해 계속해서 거듭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무료함에 침수시키나 중독은 무료해 질 수 없는 영원히 반복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는 마약을 손에 놓지 못한다. 왜 그가 마약을 하게 되었나에 관해 의문이 풀렸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마약을 손에 쥔 자가 또 있으니, 바로 토마스다. 우린 모두 ‘배틀필드’를 기억한다. 그리고 헤로인을 팔던 약쟁이의 집에 켜져 있는 배틀필드. “어떤 도깨비 같은 놈이 ’이거 줄게 더 줄래?‘라고 해서’..” 바로 토마스의 그 배틀필드다. 레베카와 잠자리도 지겨워진, 주민들을 위한 강의도 여는 명석한 그 역시도 마약을 한단 말이다. 토마스와 주인공 어쩜 이렇게 닮아 있을까. 작품 속 또 하나의 단막극처럼 주인공의 지난 행보를 축약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는 마약중독자, 그가 겪는 현실의 처절함이 중점이 아니다. ‘왜 그는 마약중독자가 되었을까‘의 문제이다.
4. 닳고 닳아 없어진
내내 치근덕스럽게 걸던 전화도 그만 내려놓았다. 이젤린을 다시 만난다고 한들, 헤어진 이유와 같을 테니까. 클럽에서 만난 여인조차 심드렁하니, 그가 향유할 것이라곤 헤로인이 유일하다. 이렇게 끝을 맺는 작품이 여간 서운할 수 없다. 우린 어떻게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에 관해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으니 무심하다면 무심한 것이겠지. 누구는 그것이 심미적이기 때문이라 말하지만, 우린 인간인 이상 결국 적정선의 심미 속에 타협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너무 근원적인 문제임에 섣부른 답을 내놓기가 버거웠던지 아쉽지만 물음을 남긴 맺음이 그런대로 부족하진 않아 보인다.
마지막 시퀀스, 그가 둘러 본 오슬로의 풍경들이 몇몇 보인다. 사실 시작 또한 오슬로의 첫 느낌을 담은 시퀀스였으니. 두 장면이 겹쳐 보이는건 그 때문이리라. 어떤 이는 풍경을 보건, 지나가던 사람을 보건, 솟은 나무를 보건 첫 오슬로의 장면 장면엔 생기가 가득했다. 그에 비해 마지막 시퀀스는 어떠한가. 무척이나 건조해보이며, 단조롭다.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은 처음을 기준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하강선에 안착한단 말인가. 기대가 닳고, 생기가 닳고, 설렘이 닳고, 심지어 사랑조차도 닳아 간다니. 최초만이 갖는 아름다움의 처연함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