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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죽음을 시도하는 남자의 사건.<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포스터

[디아티스트매거진= 신동혁]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계곡에 핀 천상의 백합이여 끝도 시작도 없이 우리의 사랑은 영원하리라 – 안테레오 드 궨탈

이 의미를 알 수 없는 글귀를 시작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영화는 ‘영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약간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건, ‘영원’이란 단어의 의미와 위 글귀의 의미에 대해 약간은 어긋나는 부분을 향한 의문이다. ‘영원’하다는 말의 의미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화는 시작부분부터 한 줄의 글귀를 통해 ‘시작’이라는 모든 사건의 출발선을 지워버리고자 시도한다. 애초에 시작도 없는 것이 어떻게 끝이 없을 수 있고, 영원할 수 있는가.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은 이 요상한 질문으로부터 걸음이 시작된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오프닝 시퀀스. 비 오는 늦은 밤, 기하학과 사랑, 천사를 부르던 사진사 이작은 죽은 안젤리카의 영정 사진을 찍으러 장례식이 치러지는 고관의 집으로 향한다. 이윽고 도착한 고관의 집은 화려한 외관에 걸맞게, 내부의 장식은 이작이 부르짖던 ‘기하학’적 구조의 인테리어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장례식이 치러지는 곳 한 가운데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는 ‘죽은’ 안젤리카가 있다. 분명 눈을 감고, 죽어 있는 것이 확실한 안젤리카이지만, 이작이 들여다보는 작은 사진기 프레임 속에서의 그녀는 맑은 눈을 뜬 채 멀쩡히 살아있다. 황급히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간 이작은 그 날 이후로 안젤리카를 잊을 수 없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죽어있는 안젤리카

여기서 죽은 안젤리카와 살아있는 이작의 시선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는 ‘사진기’이다. 사진이란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사물을 포착하는 기계로서, 소유의 집착이 엿보이는 오브제이며 또한 이동체의 움직임이 상실되는 ‘죽음’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와 다르게, 영화 속 주인공인 이작은 이미 죽어있는 생명체에 사진기를 들이 민다. 그러므로 여기서 생명의 상실과 운동성의 상실이라는 서로 다른 의미의 죽음이 조우하면서 죽음에 죽음을 선고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다. ‘죽음의 죽음’. 이는 살아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육체가 억압하고 있던 영혼의 존재가 해방되며 분출된 자유로움, 죽음의 죽음은 그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물질 세계의 총체적인 억압에서 벗어난 반물질 세계로의 편입. 이것은 바로 차원상승을 통한 신의 안락으로의 입장을 말한다.

이후 이작은 죽어가는 것에 대한 집착에 시달린다. 이미 기계화란 시대적 흐름에 밀려서 거의 사라져버린 괭이질하는 농부들을 프레임에 담는다거나, 포식자 고양이가 바라보는 먹이인 새에게 자꾸만 시선을 던진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살아 있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사라져가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것처럼, 자기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나 이작은 그들의 대화에 관심도 없다는 듯이 창문의 고정된 경치에만 시선을 던진다. 지속적으로 오랜 시간 한 곳에 시선을 남기는 것은 ‘사진’과 다르지 않다. 그의 시선은 마치 사진과 같다. 그런 그의 모습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구속을 통해 남아 있는 조금의 생명력을 고정시키려는 사람과 같으며, 사그라져 가는 것에 집착하는 모습은 마치 과거의 영광에 취해 옛 것에 함몰되어버린 고지식한 누군가들과 닮았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을 통해, 죽어가는 것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기억이란 프레임에 아로새겨진 대상은 시선의 주체와 함께 영원히 동행 한다.

안젤리카 또한 이작의 시선과 기억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그것은 단지 ‘그런 사람이 있었지……’ 하는 추억거리가 아니라, 꿈속에서 두 사람의 영혼이 신나게 날아다녔던 것처럼 아름다운 풍경에 동화된 영혼의 대면이자 동행이다. 이처럼 안젤리카란 인물로 시각화 된 영혼의 실존은 현실의 부질없음에 집중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영혼과 감정의 중후한 메시지로 작동한다.

‘너희는 영원히 살지 못한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점점 죽어가는 이작

이작이 마지막으로 프레임에 담은 성가대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신과 영혼의 존재에 대한 그의 집착과 굳건한 믿음을 상징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시선에 담아둘 수 있다고 믿는 허언스런 집착. 이처럼 이작은 영화 속에서 점점 초췌해가고, 죽어가는 존재로 그려지지만 그의 영혼이 느끼는 자유로움은 육체적 생기만 넘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며 조소한다. 실제로 현실의 고난에 치인 현대인들은 마치 새장 안의 새처럼 점점 죽어가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죽음’이란 실재계의 영역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여 이작의 죽음과 안젤리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육체의 죽음 이후에 존재하는 영혼의 삶을 확인한 존재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실제로 점점 죽어가는 이작 또한 안젤리카에 대한 그리움에 북받쳐 울부짖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초연한 모습을 보인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스스로를 프레임 안에 가두는 이작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오프닝에 보였던 한 문구에 대한 대답을 말 할 수 있다. 영원이 지닌 불멸함에 과연 시작은 없는가?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마지막 씬에서 안젤리카와 이작의 포옹은 이미 끝을 경험한 그들에게 새로운 시작이 부여됨을 의미한다. 간절히도 사랑을 갈구했던 한 남자의 소원성취이자 죽음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죽음에의 대면이라는 긍정과 부정의 접선 지점인 그들의 포옹은 그러나 사실 완전한 차원 상승의 안락을 경험한 것과 같다. 죽음이란 궁극적인 끝이 사실 궁극적 시작의 순간이란 것은 시작과 끝의 순간을 희미하게 지워 놓는다. 마치 안테레오 드 퀜탈의 문구가 영화의 오프닝을 지웠던 것처럼.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작은 신과 천사를 부르며 지향한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안젤(Angel)리카는 천사처럼 남았다. 따라서 영화는 울고 있는 남겨진 산 사람들과 웃으면서 떠나는 이작과 안젤리카의 모습을 등치시키면서 메시지를 날린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죽어가는 현대인도 보다 평안한 삶을 살며 죽음 앞에 초연할 수 있다. 마치 안젤리카의 품 안에서 평온한 이작의 미소처럼……. 그러므로 마지막 씬에 창문이 닫히며 완전히 억압되는 좁디좁은 방 안은 육체의 은유로 자리하며, 자유로이 날아가는 이작과 안젤리카를 아름답게 소묘한다. 이는 삼차원 공간에서 벗어난 영혼의 세계를 지향이다.

   
▲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마뇰 드 올리베이라 감독(2010년 칸 국제 영화제)

지난 4월 고인이 되어버린, 그러나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 제작 당시에 이미 100세가 넘은 감독의 이와 같은 작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자위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마노엘 데 올리비에라는 이것이 단지 자위에 그치지 않는 훌륭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니라 40편에 육박하는 그의 영화를 통해 그는 수많은 관객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짐으로, 스크린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영원한 생명력을 얻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에게 퀜탈과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관객 여러분! 저는 이 영화로 끝도 시작도 없이 영원히 당신들 머릿 속에 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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