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네이버 영화 | ||
첫 장면부터 주인공의 위치가 생경하다. 보통 영화에서는 중심인물을 화면 가운데에 배치한다. 그러나 <이다>는 첫 장면에서부터 주인공은 화면 아래 구석에 있다. 주인공에게 초점이 맞춰져있기는 하지만 그다음 샷 또한 여전히 주인공의 위치는 중앙이 아닌 아래 구석이다. 프레임의 대부분은 여백이다. 이것은 어쩐지 불안정해 보인다. 이러한 구도는 영화의 중요한 사건의 중심으로 들어갈수록 더 두드러진다.
![]() |
||
| ▲ⓒ 영화 <이다> 스틸컷 | ||
수녀원에서 자라, 서원식을 앞둔 안나는 이모 완다를 찾아간다. 안나는 완다를 통해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자신의 본래 이름이 ‘이다’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완다에게 자신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던 중, 부모님의 묘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완다와 부모님의 시신을 찾아 떠나게 된다. 완다와 같이 여행을 시작한 이다는 그 과정에서 부모님의 죽음과, 유대인에 관한 역사적 사건들을 알게 된다.
이다의 부모님과 완다의 아들의 유골을 확인할 때, 부모님과 완다의 아들을 죽인 남자에게 이다는 묻는다. “나는요? 왜 나는 여기 없죠?” 남자는 작은 아기라서 아무도 유대인인 줄 몰랐고, 성당의 신부님에게 맡겼다고 대답한다. 즉, 이다는 그녀의 정체성이 아직 발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따라서 그녀가 살아난 것은 모호한 그녀의 정체성 덕분인 것이다. 이러한 역설은 이다의 현재 상태와도 연결되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로 사용된다.
이 장면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유골이 나왔을 때 완다는 무릎을 꿇고 바닥을 응시하고 있고, 이다는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따라서 앵글에서 이다의 가슴 위쪽은 프레임에서 벗어나게 되고 사실상 이 장면에서 이다는 소외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유골을 발견한 것은 완다에게는 완전한 의미를 지니는 일이지만, 경험한 것이 무無에 가까운 이다에게는 그저 이 사건은 멍할 뿐이다. 이다에게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굉장히 모호한 것이고, 이다의 삶 속에 정확히 내면화된 사건이 아닌 것이다.
![]() |
||
| ▲ⓒ 영화 <이다> 스틸컷 | ||
우리는 세상을 칼라로 보기 때문에 흑백이라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화면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흑백으로 만들어진 것은 이다와 감독의 시선과도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다의 상황은 이 영화의 감독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상황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폴란드 출신이지만 어릴 적 영국으로 이민을 간 감독은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과, 폴란드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에 대해, 흑백 사진 등으로 간접적으로만 경험한 모호한 상태를 표현하고자 흑백을 택한 것이 아닐까.
![]() |
||
| ▲ⓒ 영화 <이다> 스틸컷 | ||
또한 첫 단락에서 얘기했던 이 영화의 구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이다와 완다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세상의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인물의 불안한 상태를 강조하기 위한 프레이밍인 것이다. 또 영화의 샷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백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실상 무지에 가까운 이다의 상태를 나타내기도 하고, 완다의 입장에서는 거의 다 경험했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언니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 모르고 있는 상태, 즉 두 인물의 모호한 무지의 상태를 상징하는 여백인 것이다. 그러나 유골을 찾은 후 완다가 자살하기 전에, 완다의 목욕 장면은 안정적인 구도로 다시 되돌아오는데, 이는 그녀가 이미 확고한 결심을 했고, 더 이상 이전과 같이 흔들리고 불안정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 |
||
| ▲ⓒ 영화 <이다> 스틸컷 | ||
유골을 찾기 전에, 완다의 생활 때문에 이다와 완다는 언쟁을 버리는데, 이때 완다는 이다에게 “물론 나는 창녀고 너는 어린 성녀지”라고 얘기한다. 이처럼 이다와 완다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들의 삶은 극단적인 대비를 이룬다. 세상의 많은 일을 경험한 완다와, 수녀원 속에서 경험한 것이 거의 없는 이다는 서로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다에게는 영화 속에서의 극중 인물들과의 관계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최초의 방식이다.
처음엔 철저히 완다의 삶의 방식을 거부하던 이다는, 이후 죽은 이다의 집으로 가서 이다의 옷을 입어보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는 등 이다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게 된다. 이것은 인간적 쾌락에 눈을 떠서 타락했다기보다, 이다가 결국 완다를 이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경험을 통해 자신과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았던 인물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좋아하는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서로 함께 꾸려갈 미래에 대한 얘기까지 나누었던 이다는 다음날 수녀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던 핸드헬드로 보여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카메라 방식을 통해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의 프레이밍은 안정적이다. 경험을 통해, 이다는 마음속에서 이미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후 상황에 대해서 보여주지 않고 그대로 끝이 난다.
이다는 서원식을 하지 않고 수녀원을 나왔을까? 결말에 대한 상상은 각자의 몫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 실존적으로도 중요한 서원식을 앞두고 행해진 완다와의 여행은 이다에게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여정이었다. 이를 통해 그녀는 모호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게 되었고, ‘진짜’ 세상에 속에서 단단히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