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 김광석,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할머니가 쓰러지셔서 의식불명 상태다. 그런데 남편인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의 인연을 찾아 춘천까지 내려간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사망한다. 돌아온 할아버지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않고 식장에 앉아있다. 다른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가리켜 ‘노망이 났다.’, ‘할머니가 위급한 상태였는데 할아버지는 바람을 피러 갔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연극 <나와 할아버지>의 전부다. 그리 대단한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특별한 복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짧게 축약하면 ‘할머니가 아픈 상태에서 할아버지가 바람을 피러 갔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연극이 끝났을 때, 객석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눈물을 닦으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연극은 서사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는 것일 테다.
말하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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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와 할아버지> 연극 포스터 | ||
이 연극은 특이하게도 무대의 주인공으로서의 ‘작가’와 실제로 이 극을 쓴 ‘작가’가 분리된다. 즉, 처음 시작부터 작가가 등장해 “이것은 제 수필인데요, 저기 나오는 저 주인공이 바로 접니다.”라고 말한다. 두 명의 ‘나’는 무대에 계속 나오며 이야기를 진행해가는데, 엄밀히 말해 그는 연극의 완전한 주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역할은 ‘듣고’, ‘행동하는’ 데 치우쳐 있다.
그렇다면 말하는 역할은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할아버지다. 이 연극이 <나와 할아버지>라는 제목이니 당연한 일이다. 다소 완고한 타입의 할아버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이미지와 정확히 동일하다. ‘~해야 돼.’라고 단정하는 말투, 다소 일치하지 않는 언행, 하고 싶은 말을 주워삼킨 채 내뱉지 않는 것까지.
작품 속의 작가인 나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극으로 만들고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주의집중해서 듣는다. 그리고 모든 집안사람들이 반대했던, 할아버지의 옛 인연을 찾아주기 위해 함께 춘천까지 내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할아버지의 사연을 자세히 듣게 된다. 전쟁통에 잃어버린 다리, 춘천집에 얽힌 일, 할머니와 만나게 된 이야기 등. 결국 옛 인연을 찾지 못하고 할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해 주위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욕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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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Story P | ||
말하지 않는 할아버지
때로는 부재가 존재를 드러낸다고 했던가. 연극 속에서 할머니는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초반부에 잠깐 등장해 주인공과 이야기하다 할아버지와 다투는 장면이 거의 전부다. 그럼에도 할머니의 존재는 연극 속에서 강하게 드러난다. 예컨대 할아버지가 ‘할머니가 없는 틈에’ 춘천에 가는 이유도 할머니를 의식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할머니가 죽은 뒤 찾아간다면, 마치 할머니가 죽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보였을 테다.
또한 할아버지는 할머니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함께 살아온 세월 동안 할 말이 많았을 텐데 딴 소리는 잘 하면서 정작 할머니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싫어하기 때문일까. 극의 마지막에 가면 그 이유가 드러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리 먼저 가셨소?” 할머니를 타박하는 할아버지의 대사는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을 강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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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출처: Story P | ||
할아버지는 당신이 교육받은대로, 하고 싶은 말을 감추며 살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그러니까 운동을 하라고, 운동을!”이라며 타박질하거나 지팡이로 툭툭 치는 행위를 한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할아버지지만, 실제로 그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할머니를 분명 생각하고 있음을.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렇듯 <나와 할아버지>는 배우들의 움직임이 아닌, 대사로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다. 그래서 앉아있다 보면 다소 지루해지는 것도 사실이지만, 할아버지의 고달픈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에 대한 사랑을 인지하기 시작하면 어느덧 눈에 눈물이 고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진하지 않은 국물이 더 구수할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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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2015.05.05~08.02
시간 90분
장소 예그린씨어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