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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안한 모습의 도섭 | ||
“하느님께서 이미 저를 용서하셨습니다.”
[디아티스트매거진=주동일] ‘도섭’의 한 마디에 상영관 뒷자리 꼭대기에서부터 관객들의 수군거리는 욕 소리가 물살처럼 밀려내려온다.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을 보면 ‘신체적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좋은 소설의 기준이라면 이 소설은 단연 최고다.’라는 평이 있다. 밀양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상영관 곳곳에서 관객들이 주먹을 꽉 쥐느라 찌그러졌을 콜라 컵들은 이 영화의 몰입도를 대변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 ‘도섭’을 용서하러 ‘신애’가 도착했을 때 도섭은 이미 자신이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관객들은 모두 분노에 콜라 컵을 찌그러트리지만, 정작 도섭을 비판하는 가장 적절한 ‘논리적 비수’를 떠올리지 못한다. ‘모든 인간은 소중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용서는 주님의 뜻이 아닌 너의 착각이다.’, ‘넌 진심으로 스스로의 잘못을 아는 것이 아니다’, ‘넌 싸이코패스다’ 등의 수많은 의견들이 나오지만 이런 식의 해답들은 나름대로의 논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너는 비정상이야.’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 같아 말하면서도 왠지 찜찜하다. 심지어 도섭에 대한 우리끼리의 의견도 쉽사리 좁혀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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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밀양'(이창동, 2007) | ||
애초에 우리는 도섭의 범죄 동기와 윤리관에 대한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도섭을 이해하고 그에게 조금 더 와 닿을 분석을 할 수 있을까?
(단, 싸이코패스의 경우 뇌 특정 부위의 손상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현재로서는 폭력성의 발현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섭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그의 ‘죄책감’을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도섭의 모습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에서 벗어난 그의 사고방식 때문이다.
기존에 우리가 사용했던 사실적이거나 당위적인 접근은 논리적이지만 가끔씩 사람들에게 와 닿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도섭에게 가해지는 기존의 비판들 역시 논리적이지만, 그는 그 말을 들어도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논리가 인간의 감정을 바꾸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적인 사례로는 밀양의 도섭을 들 수 있고, 긍정적인 사례로는 아무리 봐도 별로인 아내 혹은 남편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믿으며 사는 부부들을 들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기 전까지는 아무리 논리적인 명제들도(정확히는 문장 내에서 논리성을 가진) 상대를 바꿀 수 없다. 감정의 문제가 항상 논리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밀양의 살인범에 대한 비교적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그의 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죄책감은 소외와 격리, 처벌에 대한 공포감, 타인에 대한 미안함, 스스로가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책 등 여러 감정이 복합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방법과 그에 따른 행동은 모두 다르다. 우리는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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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낄 때 세 종류의 죄책감을 느낀다.
1) 상대방에(피해자) 대한 미안함
2) 자신이 악을 저질렀다는 행동 자체에 대한 자괴감
3) 사회적, 법적, 종교적 처벌에 대한 공포감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낄 때 위의 세 종류의 죄책감이 혼재되어 복합적인 죄책감을 느낀다. 그 중 밀양의 도섭은 2)유형의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다. 도섭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는 3)에 해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영화에서 도섭이 수감 후 종교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2)에 가까움을 알 수 있다.
2)유형의 죄책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초자아가 강한 경향이 있다. 초자아가 강한 사람들 중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타인’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볼 뿐 각 개인이나 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완고한 도덕관념을 가졌거나 자책감을 많이 경험한 사람들이 이런 경우인데 종교인이나 자살을 많이 시도한 사람들, 성장 과정에서 사회로부터의 고립감을 자주 경험한 사람들이 이런 예다.
그들에게 죄책감은 초자아로부터 온다. 자신이 잘못된 행동을 저질렀다는 자괴감과 자책이 죄책감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들은 죄책감의 원인인 초자아로부터 용서를 받았을 때 상당한 양의 죄책감이 덜어지는 느낌을 경험한다.
도섭의 경우 완고한 부모 밑에서 자라 왔거나 어릴 적부터 사회에서 고립감을 받아오면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잘못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큰 죄책감을 쥐어주고 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과정에서 종교에 대한 잘못된 접근으로 신을 자신의 죄를 리셋 시켜주는 존재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도섭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그에 대한 비판을 다시 시작한다면 그에 대한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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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에는 어쩌면 간계나 악의보다는 게으름이 더 많은 갈등을 빚어내는 것은 아닐까 새삼 생각했네.’ –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 ||
우리가 밀양을 보면서 경계해야 할 것은 도섭만이 아니다. 어쩌면 그를 이해하기도 전에 단편적으로 비판부터 던지는 우리들의 모습 자체도 경계해야 할 대상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아직 윤리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것이,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비판을 펼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교화 등의 효율적인 개선 역시 이뤄질 리가 없다.
죄인을 비판하는 행동은 용납되지만 그것이 맹목적으로 변하거나 합리성이 결여된다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윤리의 테두리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발을 디디게 될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돌을 던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상황에서 사실 우리가 비난하던 사람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이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앞서갔을 뿐이고 우리는 이제 갓 벗어나기 시작한 것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