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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RTIST매거진=어한빛] 영화는 탄생 초기부터 수많은 소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 왔다. 그러나 원작소설을 둔 영화가 상업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갖기란 어려운 일이다. 감독 혹은 작가가 각색을 하는 과정에서 대중에 맞춰, 오롯이 상업에 치중하여 만드는 경향이 높아, 원작의 본질적 의미-주제, 본 이야기에 내포 된 흥미·쾌락-를 퇴색하게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자본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이상의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화차>.
<화차(火車), 2012>는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로 분류되는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원작으로 하여 각색한 영화이다. 영화는, 결과적으로 각색을 통해 보고 듣는 서사→경험하는 서사로 완전히 바꿔놓았다. 단순히 각색의 개념이 아닌 소설에 대한 해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영화 <화차>는 “현대인의 필수인 신용에 대해, 자칫하면 간과 해 버리기 쉬운 신용사회의 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 수많은 신용판매회사가 ‘행복’이라는 포장지로 아름답게 쌓아놓은 소비가 ‘착각의 환상’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방향제시하는” 소설의 큰 주제는 그대로 따오 되, 몇 가지 차이를 두어 주제를 확장시켰다. ‘왜 그런 선택을 해야만 했는가’에 대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자 한 것을, 영화는 왜 그래야만 했는가를 통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변영주 감독은 원작소설이 가진 매력을 영화로 정립하기 위해 3년간 20고에 걸친 오랜 각색 작업을 거쳤다고 한다.) 즉, 개인파산 같이 사회적인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오늘 우리가 지하철에서 스쳐 지나간 여자들이 없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들이 없어진 것조차 모른다.’라는 현실에서 오는 공포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욕망이 들끓는 현대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남의 인생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녀가 얼마나 불쌍한가’가 아니라 ‘누군가의 인생을 가로채서 살아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은 얼마나 무서운가’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 같아요” -변영주 감독(씨네21 인터뷰 中)
영화는, 소설의 ‘한 화자로 이루어진 전지적 작가 시점을 해체’하고 ‘세 명의 등장인물을 살려 다초점 화자’를 만들어냈다. 다시 말해, 여자주인공 ‘차경선을 향한 세 가지 시선’을 구축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홀연히 잃어버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약혼자 장문호, 범죄자로 보고 추적하는 전직형사 김종근,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온 몸에 각인시킨 차경선이 드러내는 시선이 그것이다.
장문호(이선균 분)는 소설 구리자카 가즈야와 달리 본인이 알던 강선영(김민희 분)이, 강선영이 아니란 사실을 ‘알고’ 종근에게 선영을 찾아달라 부탁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문호는 ‘사랑-의문-두려움-분노-연민’ 감정선의 변화를 겪는다.
문호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이 대체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그녀를 어떻게든 되찾고 싶어하고 살인만은 저지르지 않았기를, 자신을 사랑했음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또, 자신의 약혼녀가 강선영이라는 인물을 도용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심지어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문호는 종근에게 “형이 선영이 알기나 해?”라고 반문하며 자신의 기억 속 선영을 옹호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경선을 바라보는 문호의 인간적인 시선을 보고있자면, 관객은 마지막까지 사랑을 놓지 않는 문호를 보며, 문호와 같이 경선이 무사히 도망칠 수 있길 바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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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산역에서 만난 차경선(강선영)을 안는 문호. | ||
“잘 지냈어? 아니지? 너가 그런거 아니지? (중략) 내가, 너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가 얼마나… 너, 나 사랑은 했니? 가. (중략) 근데, 그냥 너로 살아. 절대 붙잡히지 마.”
-영화 대사 中-
(감독은 “만약 내가 그녀와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면, 그녀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바로 내 옆의 사람이라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선택을 할까”라는 다소 난감한 질문까지 해보고 싶었다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혼마 슌스케역의 김종근(조성하 분)은, 역할이 축소되어 문호의 진실파악에 도움을 주는 실질적인 캐릭터로 변했다. 종근을, 복직을 원하며 돈을 필요로 하고 자존심이 세면서도 지켜야 할 가족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보이도록 한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보다는 사건에 집중하는 계기가 설득력 있게 비춰진다.) 수사의 시작은 ‘돈’ 때문이었지만 전직형사였기에 감으로 사건의 심각성을 파악한다. 그래서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그동안 잊고 지냈던 형사(직업)정신을 되찾고 사건에 더 집중한다.
사라진 선영의 집에서 아무 지문도 나오지 않자 종근은 “요것 봐라?” 하며 읊조린다. 이때 종근의 표정과 어조는 차갑고 냉소적이다. 관객은 종근과 함께 선영을 차갑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또, 선영의 신분이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된 종근은 문호에게 선영 찾는 것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찾아서 뭐 하겠냐. 설령 찾는다 해도, 그렇게 완벽히 타인을 사칭한다는 것은 ‘살인’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면서 말이다. 관객이 경선을 완벽히 범죄자로 보도록 하는 종근의 차가운 시선은, 종근이 제천에 내려가 경선이 선영의 엄마를 죽였을 거라고 상상하는 장면에 총집합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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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근의 상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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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근의 상상 | ||
영화에서는 차경선(김민희 분), 자신의 입장에서 본 그녀의 과거가 영상으로 드러나 관객들은 경선의 감정을 이해 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이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소설에서는 신조 교코가 겪은 과거의 아픔과 고통을 가늠할 수는 있어도 알 길은 없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관객은 그녀가 사채업자에게 손도장을 억지로 찍히고 팔려갈 때, 술집여자 차림을 하고 택시에서 내릴 때를 보면서 그 아픔과 분노를 직접 느끼게 했다. 동정의 감정을 이끌어 낸 것이다.
경선은 시골 펜션에서 선영을 죽이고 피범벅이 된 채로 자신의 뺨을 때린다. 스스로도 무섭고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살아가고픈 삶을 생각하면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이것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해진다. 피로 뒤덮혀진 속옷차림의 경선을 보고 무서워함과 동시에, 괴로워하는 경선을 보며 관객은 그녀가 얼마나 처절하고 절실한지,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민은 경선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생각하게 한다. 어느 한 모습으로 단정 지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는 감독이 의도한 것으로, 관객은 철저히 시점의 통제를 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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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가 실패로 가는 첫 지름길이 있다면 우리가 그녀를 먼저 안쓰러워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니라 관객이 ‘쟤도 참 안 됐구나’ 생각하고 동시에 ‘그래도 그렇지’하면서 그녀로 인한 희생자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번영주 감독(위의 인터뷰 中)
이렇게 영화는 소설에서 감춰져 있던 인물을 내러티브 전면으로 끌고 나왔다. 지금까지의 인물들을 통해 관객은 세 가지의 감정과 시선을 차례대로 그리고 복합적으로 보게 된다. 즉, 세 가지 관점에 따라 ‘감정·인간적-냉정적-동정·연민’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경선-선영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노출해서 경선의 심리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수면위로 올려낸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관객은, 어느 시점으로 비중을 두어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1992년의 일본이 아닌 2000년대 한국사회로 무대를 옮긴 영화는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지나칠 수 있는, 하지만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될 화두인 ‘신용불량’, ‘개인파산’, ‘사채’, ‘1인 가구’, ‘무관심’ 등의 여러 가지 사회이슈를 과감하고 정확하게 짚어낸다.
영화와 소설은, 똑같이 열린 결말을 택했지만 영화는 이렇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끝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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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살하기 위해 난간에 선 차경선 | ||
“아버지가 진 빚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 경선에게 탈출구란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자신이어야만 한다면 경선은 영원히 자본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이것은 오직 그녀가 다른 사람이 될 때에만 해방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그녀에겐 선택의 기회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모든 일이 경선의 책임일까. 또, 우리는 경선을 동정해야 하는가, 아니면 비난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미 사회구조 속에서 살해되었다. 결국, 이 모든 끔찍한 사건이 억지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 사회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우리(관객)는 이 사건이 ‘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그리고 그 일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