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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찾기

[디아티스트매거진=정은정]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라고 끝을 맺는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식민시대 청년이 우물에 자신을 비춰보며 자기를 성찰하는 것으로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리고 시대를 대변하는 걸출한 화가들의 자화상에는 단순히 자기 얼굴의 형상화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에 비치는 내면을 응시하고 솔직하게 담겨있다.

‘자화상’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그린 자신의 초상화’이다.
자화상이 독자적인 예술로 보편화 된 것은 서양화의 경우 15세기 말부터고, 우리나라의 경우엔 18세기 이후 문인 출신 화가의 그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 보편적인 사람의 지위를 갖고 나서야 자화상이 생겨난 것이다. 자화상을 예술에서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킬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다.

뒤러가 활동하던 당시의 유럽 르네상스 시절에는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거장들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반해 독일에서는 화가는 그저 그림을 그리는 기능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뒤러는 그러한 사회적 제약 속에서 속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여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케이스다.

   
▲ 뒤러 作 <자화상> 1493 | 프라도 미술관

뒤러의 자화상은 예수의 얼굴을 연상케 한다. 구불거리는 머리칼하며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다. 뒤러는 자신의 모든 그림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뒤러는 자화상을 단순히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진 복제품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뒤러는 자신의 작품이 지닌 독창성에 주목했으며, 자신의 재산권으로 지키기 위해 서명하고 법적으로 보호받고자 했던 것이다.

자화상을 말할 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모델 구할 돈이 없어서 자신의 얼굴을 그릴 수 밖에 없었다.

   
▲ 고흐 作 좌 <자화상> 1889, 우 <자화상> 1889 |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그리고 그의 친구인 고갱과 다투고 귀를 잘라 붕대를 감은 모습을 그렸다. 스스로 귀의 일부를 자르고 붕대로 치료한 초라한 자신이지만 이 또한 담담히 그려냈다. 녹색 눈동자는 또렷하다. 그 어디에도 후회의 감정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경제적 궁핍에도 그림을 놓을 수 없었던 그의 열망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중섭의 자화상도 그러하다.
이중섭은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 일본 유학을 갔다. 큰 키, 이국적 외모, 만능 스포츠맨에 가곡도 곧잘 뽑았고, 보들레르의 시도 줄줄 외웠다. 일본 여자와 결혼했고, 전쟁 후 아내가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자 상심만 남은 그를 따라다는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뿐이었고, 그에게 그림을 그릴 재료조차 주지 않았다. 판잣집 골방에서 끼어서도 그림을 그렸고, 다방 한 구석에서 웅크려 앉아서도 그림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을 살 수 없어 담뱃갑 은지에 송곳으로 긁으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월남한 그에게 ‘빨갱이’라고 수근 대는 주변의 목소리… 개인전에서 받은 비난과 모멸감….
그렇게 이중섭은 정신 이상을 겪으며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 이중섭 作 <자화상> 1955 | 개인소장

이것이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옷은 낡았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눈은 당당하다. 굳게 담은 입술에서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의 입술은 “나는 외롭고 병들었고 가난하다. 하지만 나는 미치지 않았다“고 읊조리는 듯하다.

그리고 또 이중섭의 자화상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을 연상케 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형형한 눈빛에서 선비의 지조가 느껴지는 자화상 말이다. 이 역시 겉모습을 통해 비가시적인 정신까지 그리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자화상이다.

   
▲ 윤두서 作 <자화상> 1668 | 개인소장

윤두서의 자화상에서는 부릅뜬 눈과 한 올 한 올 정성을 다해 쥐 털로 그린 수염에서 극사실주의가 읽힌다. 윤선도의 후손으로 서인의 집권 시기 남인으로 살아야 했던 시대와의 불화도 담겼다.

자화상의 영혼으로 일컬어지는 하르멘스 반 라인 렘브란트(1606~1669)는 매년 자화상을 그렸다. 젋은 시절부터 부와 명예를 누리기 시작할 때 화려한 복장을 입은 자화상부터 절제 없는 탐욕으로 인해 수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부인의 죽음 이후 한순간에 명성이 추락하게 되어 별 볼일 없는 가난하고 늙은 화가가 되었을 때의 초라한 모습까지. 거칠 것 없었던 젊은 천재화가에서 늙고 병든 거장으로 변해가는 자화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 렘브란트의 자화상 모음 | 마르크스21 3호

첫 초상화와 죽기 전 초상화의 모습이 대조적이다.

   
▲ 렘브란트 作 좌 <자화상> 1682, 우 <자화상> 1669 | 헤이그 마우리츠호이스 왕립미술관/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삶의 풍파를 겪은 자신의 내면이 드러난 자화상, 어떤 사람에게는 늙어 주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큰 고통일 수 있지만 렘브란트에게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려 놓고 들여다보는 것은 그 고통을 감내할 충분한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위의 화가들을 볼 때 자신의 실력을 고객에게 알리거나 자부심, 스스로를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자화상을 그리기도, 자신에 대해 숙고하고, 세상을 향해 이야기하려는 목적으로 그리기도 한 것 같다.

삼포세대, 사포세대, 오포세대가 늘어나는 이 시대, 결코 만만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지금 우리 자화상은 어떠한가.

참고자료

《마르크스21》 3호 (2009년 여름)
자화상전 (거장들의 자화상으로 미술사를 산책하다) 천빈 저 | 정유희 역 | 어바웃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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