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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양복의 역사 [上]

1876년까지 이 땅에 양복은 없었다…

[디아티스트매거진= 칼럼니스트 김동주] “그들의 공복(公服)은 바지가 몸에 착 붙어 조금도 여유가 없으므로, 일어서면 둔퇴(臀腿, 엉덩이와 넓적다리)와 외신(外腎, 고환) 있는 곳을 만져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다. 바느질도 역시 가로세로를 어긋나게 하고, 조각을 서로 붙이며, 느슨하게 벌어진 틈(주머니)이 있어 여기다 물건을 넣어 둔다.”

강화도 조약 직후인 1876년 4월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조선의 예조참의 김기수가 그의 견문기인 일동기유(日東記遊)에서 생경하게 표현한 일본 관료의 서양 복제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양복을 입게 됐을까?

   
▲ 동농 김가진(1846-1922)의 문관 대례복 초상화

* 동농 김가진 (東農 金嘉鎭; 1846-1922): 임시정부 항일 비밀결사조직 조선민족대동단 총재.

 

Ⅰ. 조선 양복의 기원

1900년(광무 4) 대한제국 시기 본격 도입된 서구식 문관 대례복에서 기원 되었다.

대례복(大禮服)은 큰 예를 뜻하는 바와 같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때 입는 복식이다. 문관 대례복은 대한제국 시기 문관들이 황제가 참석하는 국가 행사와 외교 행사 등에 입어야 했던 제복을 말한다. 이후 1910년 일제에 강제병합되면서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은 10년 남짓밖에 사용되지 않았지만, 양복이 일반 국민들에게 노출되면서 이후 누구나 양복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 대례복의 특징: 일본의 서구식 대례복의 문양이 황실과 무가(武家)의 상징인 오동과 국화 문양인 데 비해, 대한제국은 전통적으로 국토를 상징해 왔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무궁화를 채택했다. 대한제국의 서구식 대례복에 전면 도입된 무궁화 문양은 일제강점기에 민족정신을 결집하는 매개물로 역할을 했고, 광복 후에는 국화(國花)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Ⅱ. 양복에 대한 반발과 수용

1895년경 양복 도입 초기에는 머리를 깎으며 양복을 입는 일에 대해 강력한 민족적 저항이 있었고,이후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양복은 곧 매국의 상징이 되어버리고 말았으나, 이후 점차 서양 문물의 대세는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으며, 양복은 서서히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Ⅲ. 삼일독립운동과 2차 세계대전 발발

 

1919년 3월 1일, 삼일독립운동을 기하여 문화와 사회전반의 일대 변혁기, 즉 구문화와 신문화의 윤리적 충돌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면서도, 신문물 도래의 속도가 배가되는데, 1920년대 서울, 평양, 부산 등의 대도시에 양복점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양복 기술을 배우려는 인파로 실습소가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 오버코트 광고, 1934년 12월 11일 조선일보

 

위 사진- ‘본품(本品)은 고급 조선복(朝鮮服·한복)을 꾸며주는 옷으로서, (한복의 두루마기처럼) 소매와 가슴을 크게 디자인해 호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구문화와 신문화의 자연스러운 크로스오버로써 갓 쓰고 고무신 신은 그림이 이채롭다.

 

   
▲ 윤봉길 의사와 그의 한인애국단 입단 선언문, 1931

1920년대 본격적으로 시작된 양복의 도입시기부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39년까지 맞춤양복의 전성기는 계속 되었다. 일제시대의 사화적 갈등과 혼돈의 시기였으나,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 근대화에 강한 집착이 있던 시대적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중절모와 함께 착용하는 서양식 맞춤 양복은 개화문명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30년대 후반부터 극심한 세계경기의 후퇴로 일본, 독일 등의 후발 자본국들에 고통이 집중되며 전쟁논리가 이들 나라에 퍼지게 되면서 결국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곤경의 맞춤양복업계는 1945년 종전까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게 된다.

   
▲ 미국산 중고 양복 판매 광고, 보선일보 1935년 7월 5일

위 사진- ‘미제’임을 강조하려 넣은 미국인 신사와 국기가 이채롭다. 당시 양복의 열망을 반영.

 

Ⅳ. 광복과 한국 전쟁

광복 후, 일본인들의 양복점을 접수한 한국 양복은 진정한 의미의 1세대 테일러들인 이용화와 유택등을 구심점으로 양복의 미래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새로운 환경에 들떠 있었다. 이때 양복인 단체인 전선복장연구회가 태동, 훗날 양복기술로 세계를 제패하는 초석을 다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당시의 부족한 물자와 전시 특수상황으로 인해, 군복을 의복으로 활용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서양의 구호품들을 받아 피난 양복인들이 부산에 모여 군복과 구호품등을 수선하며 생존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한국의 맞춤양복사에 있어 암흑의 터널과 같은 시기였다…

   
▲ 이승만

이전의 비스포크 맞춤 정장의 세계 上 편에서는 맞춤정장의 과정에 집중하여 소개 했다. 
관련 글 http://www.thearti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9

지난 글에 이어, 이번에는 한국전쟁까지의 한국 맞춤정장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다.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 맞춤정장의 역사는 다음 호에 계속 연재하기로 한다.

자료 출처
조국으로 가는 길 (한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 http://www.sculturein.com/news/1277 
모던광고 파노라마 http://m.zum.com/news/home/5961960
이경미 한경대 의류학과 교수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2901032430074006
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 http://www.tailo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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