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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로스코> 전, 마음을 움직이는 색의 아우라

(디아티스트매거진=김명진)

혼자 보기 좋은 전시

햇살 좋은 날, 혼자서 산책 겸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마크 로스코는 워낙 유명한데다, 이전에 리움 상설전시에서 봤던 강렬한 기억도 있었기 때문에 전시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런데 내 기억 속의 로스코와 실제 로스코는 달랐다. 이 전시를 접하기 전에는 그가 이토록 무겁고 어두우며 철학적인 사람인 줄 몰랐다. 밝고 맑은 바깥 날씨가 무색해질 만큼, 전시의 내용은 차분하고 진지했다.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마크 로스코 전

이 전시를 혼자 보는 것을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을 볼 때 철저한 ‘감정의 몰입’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색과 면의 관계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관람자는 거대한 색의 소용돌이를 보며 화가의 내면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 속으로 빠져든다. 이 과정에서 옆에 있는 친구나 연인과 함께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사실 나눌 만한 이야기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전시는 재미있는 전시가 아니다. 철저한 내면 속으로의 몰입. 그것이 로스코의 작품을 보며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색이 채워진 거대한 면들을 바라보면, 이런저런 생각들로 가득했던 머릿속이 그림처럼 단순해진다.

강렬한 삶과 죽음의 에너지

전시를 쭉 보다 보면, 벽면에 쓰여 있는 화가의 말들이 군데 군데 보인다. 그 말들을 읽으면 로스코가 좀 거만한 사람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건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나는 너의 심장을 움직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거야!”라고 로스코는 당당히 외치고 있다. 그런데 화가가 깊게 몰입한 만큼 나도 몰입할 수 있을까? 이건 어려운 문제다. 사실, 필자도 초반에는 그저 어렵게만 느껴져서 멍 때리며 작품들을 바라봤다. 뭔가 느낌이 있긴 하네, 강렬하네, 하면서도 작가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마지막 작품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로스코가 죽음 이전에 남긴 마지막 그림을 보고 나서, 전시를 처음부터 다시 봤다. 그러자 비로소 색이 칠해진 면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마지막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그 작품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제목이 없으며, 온통 강렬한 빨강일 뿐이다.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저 빨간색일 뿐인데, 나는 어떻게 그 앞에서 그토록 커다란 에너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마치 죽음 직전에 작가가 가지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넣은 것처럼, 그 빨강에서 삶과 죽음이 느껴졌다. 차분한 검은색 그림들이 조용히 죽음에 대해 사유하고 있었다면, 이 빨간 그림은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로스코가 마치 그의 삶 전체의 결과물인 것 같은 이 그림을 쏟아내고 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기 전에, 누군가 붙잡아줬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로스코는 완전히 다른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망상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전시를 다시 보고 나서는 로스코가 느꼈던 감정들에 압도당했는지, 좀 많이 센치해졌다. 그 센치한 감정이 지나가고 나서 회상해보니 스스로가 중2처럼 느껴지고,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뭔가 강한 감정에 이입되었던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를 테지만, 필자처럼 몽상가 기질이 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감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이 전시를 보고 복잡했던 고민이 단순한 해답으로 정리되었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위로를 받았다고도 한다.

   
▲ 무제, 1970사진으로 보면 그냥 빨간색일 뿐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아우라를 지닌 로스코의 마지막 작품.사진출처 www.lost-painters.nl

현대 회화의 ‘아우라’

아우라(Aura)란 예술 작품의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를 말한다(출처: 네이버 사전). 덧붙이자면, 예술 작품을 마주했을 때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에 들어서면서 예술작품의 ‘아우라는 사라졌다’고 이야기했다. 그럴 만한 것이, 이제는 작품을 직접 보지 않아도 인쇄물과 인터넷에 작품의 이미지가 넘쳐난다. 모나리자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우리 모두가 모나리자의 얼굴을 알고 있다. 그러나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다르다. 직접 보지 못했다면, 로스코의 작품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전시를 보고 나오니 아트 샵에서 전시 포스터와 엽서 등을 팔고 있었지만 사지 않았다. 포스터를 보는 것과 작품을 직접 보는 것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같은 작품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색감이 사진으로 표현되기 어려울뿐더러, 작품의 크기가 아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크기를 줄이면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었다. 실제로 전시를 볼 때, 작품의 크기가 큰 작품일수록 강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색이 채워진 캔버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구상회화와는 다른 종류의 아우라가 생겨난 것이다. 필자가 앞서 언급했던 로스코의 ‘마지막 그림’ 역시, 도록으로 보면 그저 빨간색일 뿐이다. 그냥 빨간색. 그러나 작가의 손이 닿은 실제 작품에서, 그 빨강은 생명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아우라’ 아닐까.

   
▲ 사진출처 www.markrothko.co.kr

입장료 성인기준 15000원, 관람시간 저녁 8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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