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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_혜화동1번지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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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 사드
작_ 페터 바이스
연출_전윤환
[디아티스트매거진=정인태] 앤드 씨어터는 작년 겨울 대학로에서 있었던 이십할 페스티벌과 서강대 메리홀에서 있었던 서울 연극 박람회 <주거죽어죽여> 무대, 소품 디자인으로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서울 연극 박람회 때 일본의 연극인들과 한국의 연극인들이 모여 공연을 했었는데 일본은 도시와 자연의 공생이라던가 현대 도시인의 삶의 공통분모에 관한 것이 연극의 주된 내용이었는데 한국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담고 있었고 조금은 정치적인 이야기도 들어간-들어갈 수밖에 없는-연극이 주를 이루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혜화동 1번지에서 봄 연극 페스티발의 이름을 ‘총체적 난극’이라고 정한 것도 총체적 난국인 이 시대에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연대와 발언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 공연인 <마라 사드>는 이름은 친근하면서도 극 자체의 내용이나 분위기는 생소한 연극이었다. 미술사를 배우면서 자끄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 대해 미술사적인 의미만 배웠지, 시대 배경은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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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라의 죽음>. 자끄루이다비드.1793. 다비드는 마라와 친구였는데 죽은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가 마라의 얼굴을 석고로 떠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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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드는 전공 수업으로 영상에 대해 배우면서 자주 언급되던 사람인데 육체적인 쾌락을 중요시 했다던 사람으로만 기억이 남는다. 사드의 저서인 ‘소돔의 120일’은 1975년에 영화로 제작이 되었는데 4시간이 넘는데다가 동성애적인 코드 중에서도 섹스, 변태적인 성욕에 대해서만 다루는 노골적인 장면이 많아 비위 상 끝까지 보진 못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 이번 연극에서는 페터 바이스의 원작에서 크게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마라 사드>를 무대에 올렸다는 그 자체로 아주 확실하게 의도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싶다.
무대는 V 자 구성이었는데 왼편은 마라와 정신병자들, 오른편은 사드와 (동성애적 코드를 물씬 풍기는) 사람들 네 명, 중간에 왔다 갔다 하는 뒤페레와 코르데가 중심인물이었던 것 같다. 마라는 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며 혁명, 개혁, 평등을 위해서라면 희생은 뒤따라 올 수밖에 없음을 깨닫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싸워 쟁취해야한다는 인물인데 병으로 인해 피가 흥건한 욕조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사드는 마라와는 반대편에 있는 인물로 개인의 정치적인 자유는 부질없으며 그로 인한 희생을 경멸하기까지 한다. 그는 더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개인의 육체(적인 욕구)의 해방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코르데와 뒤페레는 사드에게 영향을 받은 인물로, 코르데는 기면증(수시로 불가항력적으로 잠에 빠지는) 환자이며 3번의 방문 끝에 마라를 암살한다. 뒤페레는 코르데의 연인(이라고는 하지만)으로 코르데를 돌보(는 척하며 수시로 코르데의 몸을 더듬음)는 인물로 어떠한 정치적인 의견도 없이 문제가 있을 때마다 회피하는 유형이다.
인물 소개만으로도 전체적인 줄거리가 나온 듯하다. 마라와 사드의 이야기는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분명 시대도 다르고 인물도, 나라도 다른데 한국에서 극을 올린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마라와 사드라는 극단적인 인물보다는 중간에서 마라와 사드를 오고가는 코르데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코르데라는 기면증 환자는 언제나 잠에 취해있어 현실과 상상을 오고가기에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구분짓기를 힘들어 하는데, 사드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마라를 세 번의 방문 뒤에 암살하라는 명령을 한다. 코르데는 계속 그 임무를 되뇌이며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지만 그 임무의 정당성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못한다. 잊어버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코르데는 수십 수백 수천의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마라를 단지 죽음으로 내모는 위험한 혁명가로 치부해버린다. 인간의 목숨은, 생명은 매우 귀중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며, 어떤 이유로든 쉽게 포기하려는 것은,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안정에 물든 건 아닐까? 희생이 무서워 우리는 당연히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 코르데가 기면증으로 인해 깊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 파묻혀 깊게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시대는 헤겔이 말했듯 끊임없는 정반합의 과정을 겪는다. 최근에는 사고가 확장되어 정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며 반 또한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고, 합 역시 마찬가지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양 극단에 서 있는 마라와 사드의 논쟁이 오히려 더 의미 있어 보인다.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이 확고하며 논쟁을 통해 서로를 인정한다. 중간에서 휩쓸리며 뚜렷한 자기주장이 없이 시키는 대로 사는 코르데와 뒤페레, 마라를 의존하여 소리만 지르는 마라 주변의 정신병자들이 더 ‘나쁜놈’같아 보였다.
6월 7일까지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에서 벌어지는 총체적 난극의 다른 작품 또한 이 시대를 어떻게 풀어내고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