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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낙동강

[THE ARTIST 매거진=윤서인] 나고 자라기를 서울에서 했지만, 부모님은 두 분 모두 경상북도 안동(安東)사람이다. 한 20여 년 동안 강이라고는 한강밖에 몰랐던 내가 낙동강을 볼 때 느끼는 정취는 우리 부모님이 가지고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일 테다. 필자에겐 귀향길에 오고 가며 창밖으로 보는 낙동강이 전부였지만, 당신들은 강과 함께 자라셨기 때문에.

  어렸을 때는 으레 다른 친구들도 명절이나 방학 때마다 어딘가 사람이 드문 시골로 가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할 장소는 동네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잘 알고 “네가 누구네 집 큰딸이구나”를 연발하는 집성촌이며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를 것 이라는 생각은 덤이었다. 이토록 사람이라곤, 특히 또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골으로의 귀향이 흔한 것이든 흔치 않은 것이든, 덕분에 내 유년시절의 방학은 장난감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시작해서 놀이로 끝났다. 여름이면 으레 할머니댁 앞의 개울에서 천렵을 했었고 아버지나 삼촌이 피라미 배를 가르고 매운탕을 끓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정 할 일이 없는 날에는 도시로 올라가버린 다른 사촌 언니가 남겨두고 간 장미접기종이들을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이미 다 만들어진 장미나 종이학을 동생과 나눠 가졌다.

  이런 기억들 속에, 안동 시내나 외곽을 쏘다니며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그럴싸한 캐치프레이즈를 온 몸으로 느껴보았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 당신들이 삼십 여년의 시간동안 보아왔던 동네여서 그런지, 당신들의 아들딸에게도 별 새로운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셨기 때문이리라. 서울에 살지만 서울에 대해 거의 모르는 필자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한 2012년을 기점으로 귀향 후 일정이 대폭 수정되었다. 갑자기 관심이 생겼다고 해야 하겠는데,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이 공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의 집결지, 말 그대로 “정신문화의 수도”이기 때문이었다. 경북에서 대구문화권 다음으로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이 공간을 고향이라고 말하기엔 나는 안동에 대해서 너무나도 무지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면허가 없기에, 명절에 할 일이 없는 아버지나 사촌 오빠를 기사로 세워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도산서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병산서원, 봉정사, 제비원, 안동댐, 여러 기의 전탑(塼塔)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하회마을, 고택들, 향교들, 그리고 멀지 않은 영주의 소수서원과 부석사. 기실, 이리 볼거리가 많다보니, 꼼꼼히 돌아볼 목적으로 내려간다면 이 근방에서만 족히 2박 3일은 걸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민속박물관이나 소주박물관, 유교테마파크처럼, 전통문화컨텐츠를 살린 공간들이 안동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낙동강을 따라 흐르던 이야기들은 이제 하나의 볼거리, 즐길거리가 되어 여행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 낙동강 월영교의 야경

  오며가며 익숙했던 낙동강이 여러 이야기들을 겹겹이 쌓아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서야 월영교를 다시 찾았다. 낙동강줄기를 막아 버티고 있는 안동댐은 넓은 호수를 만들어 근방의 도시들에 식수를 제공한다. 덕분에 도산서원 앞의 물줄기가 서원쪽으로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은 여담이다. 여행객들의 접근성이 높으면서도 낙동강의 아름다움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다리가 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안동역과 가장 가까운, 안동호 끝자락 즈음에 월영교(月映橋)가 강 위에 사뿐히 얹어져 있다. 월영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책교, 그러니까 나무다리이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이 나무다리는 한 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먼저 명을 달리한 남편 ‘원이 아버지’ 이응태를 그리는 마음을 가득 담아 머리카락으로 미투리를 삼으며 언문편지를 써내려갔던 젊은 과부를 기리기 위해 다리의 일부를 미투리 모양으로 만들었다 한다. 검은 밤에 도착해 바라본 월영교는 검게 흐르는 낙동강 위로 색색의 조명을 얹어 야경을 뽐내고 있었다. 밤의 월영교는 지순했던 그녀의 사랑보다 화려한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월영교 한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월영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영교의, 낙동강의 정수는 밤에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다만 화려한 조명이 만들어내는 야경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이전부터 안동댐 근방의 마을들은 ‘달골[月谷]’이라 불리웠다. 비록 필자가 찾은 정월 초하루의 월영교, 그 위 하늘엔 달이 모습을 숨기고 있어 그 자태를 볼 수는 없었지만, 다만 분명한 것은 달이 둥실 떠있는 낙동강의 야경을 본 사람들이라면 이 부근의 지명을 왜 ‘달’에서 따왔는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 목책교의 이름을 공모하면서 여러 쟁쟁한 후보자들이 나왔지만 당당히 ‘월영교’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연유도 위와 같을 것이다. 신발이 나무판자를 경쾌하게 때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걷다보면 이내 다리 한 가운데의 ‘월영정(月映亭)’과 강 건너 언덕 위의 객사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강 위에서의 정취는 이리도 평화롭고 한적하다. 그 장소에서 400년이 지나 원이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청상과부의 서러움과 외로움에 같이 슬퍼하기도 하고 객사에 묵었을 여러 손님들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 선성현객사

  월영교를 건너 반대면 강기슭에 도착하면, 꽃이 필 때를 기다리는 벚꽃나무들이 일렬로 쭉 늘어서 있는 것이 벌써부터 봄이 기대된다. 주간에 방문한다면 근방의 민속박물관과 문화관광단지를 돌아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될 것이다.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석빙고와 멀리서 보이던 선성현객사가 조명을 받고 서있다. 선성현은 본래 경상북도 예안의 옛날 이름인데, 예안은 일제 초 안동에 편입되었다. 해방이후에 이 객사는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을 피하기 위해 이 높은 언덕 위로 옮겨 자리하게 되었다하니 꽤나 기구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올라온 길 건너편엔 조명이 없는 내리막길이 민속박물관 방향으로 나있다.

  다음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낙동강을 건너면서 운전 중인 아버지께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안동댐과 안동호가 언제 생겼냐는 나의 질문에 아버지는 당신이 고등학교 다닐 즈음이었다고 대답해주셨다. 공고에서 토목공학과를 졸업하신 아버지는 안동댐 시공식 행사가 있던 날에 친구들과 함께 불려가서 이런저런 축사를 듣고 박수를 쳤다고 했다. 같은 안동이라 해도 집이랑 학교가 너무 멀어서 중학교 때부터 자취를 시작하신 당신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새삼 나의 서사와 당신의 서사가 이리도 다르구나를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원이 엄마의 이야기와 객사 손님들의 이야기 위에, 이 다리 넘어 거대한 호수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내 아버지들과 아버지의 아버지들의 이야기까지 얹어진다. 그리고 정월 초하루의 다리 위엔 나와 우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낙동강은 선인들과 우리들의 서사들을 겹겹이 쌓아 올리고선 바다로 흘러내리며, 도도하게 이 서사들을 싣고 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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