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티스트매거진=상아] 방콕에서 나이트 버스로 10시간. 치앙마이 버스 정류장에서 작은 미니버스로 갈아타고서 다시 3시간 더. 꼬불꼬불 산기슭을 둘러 둘러 알록달록한 마을에 도착한 건 점심때가 지나서였다. 버스에서 내려 숨 한번 몰아쉬고는 게스트하우스 문을 두드렸다.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맘에 들지 않아 결국 책에서 봤던 방갈로 숙소를 찾았다. 골목 끝, 조금 엉성해 보이는 다리를 지나서 오른쪽으로 돌면 나오는 수십 개의 방갈로들. 조용히 흐르는 강을 옆에 끼고 있는 리버뷰 방갈로를 골랐다. 샤워를 하는 김에 손빨래도 하고 탈탈 널어서 방갈로 앞에 널어두니 방콕과는 사뭇 다른 바람이 불어왔다. 수완나품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맡게 되는 숨 막히는 뜨거운 바람이 아니라 산 건너 강 따라 불어오는 산들바람. 커다란 나무 기둥 사이에 늘어져있는 해먹에 걸터앉아 멍하니 강을 바라봤다. ‘그래, 내가 이것을 보려고 이곳에 왔구나.’
![]() |
||
| ▲ 방갈로 숙소에서 바라본 바깥풍경. 반 빠이 리버 사이드 게스트하우스. | ||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열심히 울고 훌훌 털어버려야지. 또 한 번의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망쳐온 대피소는 태국. 이 전의 일본 여행이 패기 넘치는 이십 대 초반의 열정이었다면 이번엔 온갖 사기와 사회생활의 쓴맛을 본 이십 대 중반의 도피였다. 함께 일하자던 파트너는 한순간에 남으로 돌변했고 더 이상 내가 돌아갈 자리는 없었다. 사직서랄 것도 없이 쫓겨난 팔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시작한 일이라 그만큼 기회도 빨리 찾아오는 줄 알았는데, 함정이었다. 멋진 여객선은 순항하는 듯했지만 이내 큰 파도를 만났고 내가 탄 여객선은 알고 보니 무자비한 해적선이었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남은 돈으로 첫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다. 그렇게 도착한 방콕에서 나름의 휴식을 취하는가 싶었지만 매일같이 시끄러운 람부뜨리 거리와 카오산은 시뻘개진 눈을 하고 웃통을 벗어던진 어리고 무례한 서양인들과 호객행위에만 혈안이 된 장사치들뿐. 물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중이었지만 그 순간만큼 그들은 내게 썩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마음을 편히 풀어놓을 수 없었다. 일주일을 방콕에서 머무를 계획이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택시를 잡아타고 북부정류장으로 향했다. 200 밧을 달라던 택시기사는 정류장에 도착하자 50 밧을 더 요구했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달라는 대로 줘버렸다. 이제 와서 팟타이 한 그릇 돈으로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었다.
Chang Bus tour 610밧. 제일 비싸고 좋은 심야버스였다. VVIP쯤 되려나?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미리 검색하고 간 덕분에 버스표 창구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태국어도 모르고 영어도 몰라서 버스회사 마크만 눈에 불을 켜고 찾았다. 내가 탈 버스는 9시간이 걸리는 장거리 버스. 카오산 근처에서 여행자 버스 표를 반값에 구해서 타고 갈 수 있었지만 그러기 싫었다. 태국인들 틈바구니에서 다니고 싶었다. 그리고 여행자 버스에서는 좀도둑이 많다는 소문도 돌았고, 닭장처럼 다닥다닥 붙어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야 한다고 했다. 절대 사양이다. 그리고 내가 탈 버스는 2층 버스였기 때문에 굳이 웃돈을 더 주고서라도 타보고 싶었다. 언제 2층 버스 타보겠냐는 생각이었다. 버스는 해가 지고 나서야 출발했다. 2층에 앉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앞 좌석은 탁 트인 전망 때문에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흔한 기회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외국인 커플이 오더니 자신들의 자리라고 했다. 나는 분명히 이 좌석을 배정받았는데.. 분위기가 자기들은 커플이라 둘이 꼭 함께 앉고 싶다는 듯했다. 영어를 뭘 알아들어야 말을 할 텐데 나도 혼자 여행 와서 론니한 낭만을 큰 창을 통해 즐기고 싶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입도 뻥끗 못 한 채 그래, 커플 만세 너희끼리 다 해 먹어라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고는 냉큼 뒷자리로 바꿔 앉았다. 방콕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꼭 제일 앞자리에 앉아야지 생각하며. 버스는 상당히 좋았다. 610밧 이라고 해봤자 한국 돈으로 2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었는데 담요도 주고 나눠준 박스에는 음료와 간단한 간식거리가 들어있었다. 심지어 휴대폰이나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었으며 개인별 모니터와 머리맡 양방향에 달린 스피커, 타인을 고려한 헤드셋까지 있었다. 2만 원짜리 버스가 여느 항공 기내 서비스 못지않았다. 심야버스를 검색할 당시 버스를 탈 때 주의할 점이 있었는데 차내에 에어컨을 어마 무시하게 틀어댄다는 것이었다. 꼭 겉옷을 하나 준비해 가라고 써져 있어서 원피스만 입고 있던 나는 한국에서 들고 간 야상을 빼내들었다. 물론 내피가 필요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에어컨 틀어봐야 얼마나 튼다고 쉽게 넘겼었다. 그러나 버스회사에서 나눠준 담요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동태가 되었을지도…
![]() |
||
| ▲ 두번째 묵었던 테라스 딸린 독채. 성수기 끝물이라 싸게 방을 잡을 수 있었다. | ||
가는 길은 조금 험난했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나자 지난해 폭우로 인한 수해로 아스팔트 도로 곳곳이 붕괴되어 있었고 건너기조차 아슬아슬한 구간도 있었다. 차가 잠시 멈추었다. 불안한 마음에 창밖을 내다보니 운전기사분께서 버스 뒤편에 있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타이어가 펑크가 나거나 도로를 건너지 못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버스. 없는 것이 없다. 화장실까지 제대로다. 치앙마이로 가는 길도 험했지만 버스안도 험난하기는 매한가지. 멀지 않은 좌석에서 들려오는 코골이의 굉음까지 덤으로 험난함은 두배가 되었다. 코골이는 헤드셋을 넘어서 내 귀에 꼭꼭 박혔다. 단 한 번, 기사 아저씨의 쉬야 타임을 위한 정차만을 하고서 쉬지 않고 달려온 버스가 드디어 종착역인 치앙마이 아케이드에 다다랐다. 아침이 밝았지만 버스 안은 겨울밤공기 수준이었다.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에어컨 바람에 온몸이 띵띵 불어서 밖으로 나오니 바깥공기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2월 말의 치앙마이는 서늘한 가을 날씨를 하고 있었다. 방콕과는 다르게 도심의 형상보다는 우리나라의 구미나 대구의 공단 형태가 더 눈에 띄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고 한낮의 햇살은 따가운, 하지만 습하지 않아서 방콕처럼 땀이 많이 나지는 않았고 더위 먹을 염려도 없었다. 대체로 선선하고 해 질 녘 마실 나가기 좋은 지역이었다.
![]() |
||
| ▲ 거리 청소중인 태국 군인들. | ||
꼬불꼬불 산길이 이어진다. 치앙마이 아케이드에서 여행자 마을로 나를 인도해줄 미니버스에 올랐다. 9시간 버스를 타고 와서 또 3시간을 더 들어간다. 누군가는 이 산길을 미니버스와 함께 올라가다가 제발 세워달라고 버스 기사에게 빌기도 하고, 버스가 출발하면서부터 도착지에 다다를 때까지 헤드뱅잉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한 멀미’한다는 내가 그리도 편하게 창밖 경치 구경을 하며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천운을 타고난 내가 치앙마이 최고 양반 운전기사를 만났기 때문! 그분께서는 코너를 돌 때마다 먼저 경적을 울려 마주 오는 상대편 운전자를 배려하였고, 천천히 가는 한이 있더라도 속도를 욕심내지 않는 마음자세를 지니셨다. 덕분에 편안한 버스길이 되었지만 행운은 그때 한번뿐이었다. 다시 치앙마이로 돌아가던 버스에서는 통성명도 안한 남정네 품안에 안기다 시피 하여 내려왔다. 지금도 고마워요 베이스 오빠!
![]() |
||
| ▲ 신나게 물놀이 했던 빠이의 계곡. | ||
해먹에서 뒹굴뒹굴하고 흐르는지 흐르지 않는지 알 수 없는 강이나 바라보고 심심해서 맥주나 마시러 다녔다. 완벽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해먹에서 보냈다. 커다란 나무들 사이에 해먹과 나는 나란히 널려있었다. 눈 떠질 때 일어나서 방갈로 리셉션에 있는 커피를 챙겨 마시고 담배 한 대 태우며 멍하니 강만 바라보다가 해먹에 늘어져 또 잠을 잤다. 배가 고파서 마을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 나가서 길가에 파는 음식을 사 먹었다. 돼지구이와 쏨땀은 나의 주식이었다. 돼지구이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었지만 태국의 김치 혹은 샐러드로 불리는 쏨땀. 우리는 이 쏨땀에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PAI에 가면 Aya Service라는 곳이 있다. PAI 버스정류장 바로 옆이라서 절대적으로 찾기 쉽다. 모든 버스는 Aya Service 앞에 정차한다. 그 Aya Service 바로 맞은편이 치앙마이에서 제 일가는 쏨땀집. 이건 치앙마이 주민이 인정했다. 나는 그 쏨땀 맛에 반하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다시 반했다. 매일 가니까 얼굴이 익을 때도 됐고 해서 만드는 법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처음에 물을까 말까 망설였다. 거절하면 끈질기게 매달려야지 하고 생각한 것이 무안해질 정도로 아주머니께서는 단번에 오케이 하며 옆에 서라고 하셨다. 심지어 절구 봉을 내게 쥐여주고 직접 만들어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런 so cool한 주인장 같으니. 특별한 양념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갖은 재료들이 한데 섞여 맛의 정점을 찍었다. 재료들을 불러 주시는 대로 수첩에 소리 나게 적고는 나중에 하나하나 다시 물어보았다. 한국에 가서 꼭 해 먹어 봐야지 했지만 덜 익은 파파야를 대체 어디서 구해야 할지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아 아직까지 실행해 보지는 못 했다.
![]() |
||
| ▲ Aya Service 건너편 쏨땀집. 자주가면 고기 싸먹을 쌈 야채도 덤으로 주신다. | ||
하루라도 이 집 쏨땀을 먹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하루 한 끼는 꼭 Aya Service 맞은편 쏨땀집에서 해결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맛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벽에 붙어있던 해진 한글 종이를 덧칠했다. ‘쏨땀 맛있어요.’ 먼저 온 누군가가 나와 같은 마음에서 붙여 놓았을 것이다. 진해진 글씨 덕에 눈에 잘 띄어 쏨땀집 가계도 많이 나아지길 바랐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늘 밝은 얼굴로 정성스레 쏨땀을 만들어 주던 아주머니. 가게에 달린 뒷방에는 늙은 노부부도 함께 지내는 듯했다.
어둑어둑 저녁이 밝아 온다. 저녁 장을 알리는 듯. 하나 둘 켜지는 노점의 불빛들. 골목 저 끝에서 강다리 끝까지 켜진 노란 전구들. 그 사이로 엄마 따라 장사 나온 미키가 있었다.
![]() |
||
| ▲ 나의 예술적인 풍차돌기를 넋놓고 바라보는 사람들. | ||
길가에서 동네 꼬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풍차 돌기를 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서 나도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지구를 들었다 놓았다. 내 풍차 돌기 실력에 놀란 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길 가던 금발 커플들도 놀랐고 옆에서 장사하던 노점 사장님들도 놀랐다. 다들 키득거리며 저 까올리 따이 이상하다며 놀리는 듯했다. 악의 없는 놀림에 나는 되려 즐거워하며 아이들과 인사를 했다. 동그랗게 뜨고 있는 까만 눈이 예뻐서 들고 간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누군가 말했다. 사진기나 사진관이 흔하지 않아서 즉석 사진기로 사진을 찍어주면 좋아한다고. 혹시나 하고 들고 간 사진기가 제 몫을 톡톡히 하였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이런저런 다양한 포즈를 취하였고 찍어 달라는 대로 다 찍어 주고서 나도 바닥에 퍼질러 앉아 함께 사진을 찍었다. 동네 꼬맹이들 중 제일 큰 아이 미키. 일곱 살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매일 저녁 미키네가 장사를 나왔나 안 나왔나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같은 자리 엄마 옆에 꼭 붙어 앉아있던 효녀였다. 미키의 어머니는 그 더운 나라 태국에서 군고구마를 팔았다. 처음에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지만 고구마 한 봉지 사들고 레게 바에 가서 술안주 삼아 먹으니 더 할 나위 없는 주전부리였다. 밤이 되면 날이 쌀쌀해져 덜 식은 고구마 하나 쥐고 있으면 손 난로가 필요 없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고 열흘새 정이 많이 들었다. PAI에서 만난 한국인 언니가 있었는데 아이들 만나면 주려고 부러 들고 온 연필과 공책을 들고 왔다고 했다. 언니가 PAI를 떠나며 내게 부탁했다. 동네 꼬맹이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나는 당연히 그러겠다고 약속하고는 내가 떠나기 전 날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고는 작별을 고했다. 마지막으로 미키에게 인사를 건넸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한국어로 말했다. 신기한 것이 미키에게 나 내일 떠난다고 말하자마자 갑자기 나에게 폭 안겨서는 그 큰 눈에서 더 큰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는 것이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조그만 두 손으로 내 옷자락을 붙잡고 있는 것이 너무 안쓰러워 보이고 미안해서 나도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둘 다 눈물 콧물 짜고 있으니 옆에서 미키 어머니께서 키친타월 같은 걸 건네주셨다. 스무 살 가까이 차이나는 어른과 아이가 길바닥에서 질질 짜고 있으니 좀 우습기도 했고 단시간에 이렇게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웠다. 나는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 말씀 잘 들으라고 당부했다. 알아들은 건지 분위기상 그런 체하는 건지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던 미키와 아쉬운 작별을 했다. 이후에 PAI를 찾아간 지인이 있으면 꼭 미키를 찾아봐 달라고 했지만 다들 일정이 바빴는지 아니면 미키 어머니께서 장사를 나오지 않으신 건지 그 이후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벌써 3년 전 일이다. 이제는 약속을 지켜야 할 때인 것 같다. 아직 그곳에 살고 있을지, 나를 기억할지 알 수는 없지만 내게 특별했던 작은 산골 마을의 어린아이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PAI를 찾아야 한다.
![]() |
||
| ▲ PAI의 골목대장들. | ||
짜증으로 가득했던 방콕에서의 그 순간조차 지금에 와서는 아름다운 불빛들이 가득한 동남아의 작고 복작이는 골목쯤으로 여겨진다. 기억이 미화될 때, 우리는 추억한다. 이제는 태국을 가려고 했던 이유조차 아득하다. 힘들고, 시끄럽고, 가는 길이 험하고 멀었지만 그리고 그 길을 똑같이 돌아 나왔지만, 다녀오기 전보다 후가 더 행복하다. 그곳의 사람들, 먹거리, 풍경들. 그중에 제일은 사람이었다. 인위적이지 않은, 그게 생활이라는 듯 매일 밤 웃으며 장난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행복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 나도 섞여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절로 웃음이 나고 행복했다. 따뜻한 오후의 햇살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마시는 맥주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그곳. 산으로 둘러싸인 비밀 요새 같은 그곳을 다시 찾을 것이다. 힘들고 지친 마음이 아닌, 내가 받은 그만큼의 행복을 돌려주러. 나는 다시 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