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IST 매거진=양지나 에디터]영화를 보다 문득 미술 작품에서 본 듯한 장면이나 의미가 생각 날 때가 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래 전 부터 이 두개의 분야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왔다. 영화 감독이나 미술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로써 같은 화두를 경험한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나 미술작품이 공통적인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 줄까. 또 이런 화두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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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래비티 | ||
그래비티 그리고 바넷 뉴먼의 숭고
광할한 우주에 나 홀로 있다면, 우리는 한번쯤 그러한 상상을 해 왔다. 이 상상을 실제로 옮겨놓은 영화가 있다. 영화 ‘그래비티’는 다른 SF 재난 영화와 달리 실제 우주를 영화상의 공간으로 가져왔다. 허블 망원경을 연구하던 스톤 박사는 예상치 못한 우주 폭풍으로 나 홀로 우주에 남게된다. 이 상황이 어느 재난 보다도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주의 광할함, 인간 존재의 미미함을 극적으로 다룬 덕분이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 속으로 사라져 가는 스톤 박사를 보며 대 자연의 위엄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소리도, 공기도 없는 검고 짙은 공간에 자신의 의지로 몸을 통제 할 수도 없는 공간, 우주.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서 인간은 한낱 종잇장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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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넷 뉴먼의 연작 단일성 | ||
미국의 색면추상 작가 바넷 뉴먼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다. 그는 작품을 시작하기 전 커다란 캔버스를 단색으로 칠해 두곤 했는데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커다란 색면 캔버스를 보고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만다. 그가 느낀 그 감정은 아마 우리가 그래비티에서 느낀 충격의 감정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 감정은 예술가들이 평생 과업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미’를 찾았을 때 느낌과 같은 것이었다. 예수의 제자 모세는 호렙 산에 올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그 음성은 인간의 존재를 뛰어 넘는 ‘어떠한 힘’을 느끼게 하는 것이였다. 미지의 힘이나 대 자연과 같이 거대한 힘 앞에서 작은 존재인 인간이 느끼는 감정. 이것이 뉴먼과 그래비티의 관객들이 느낀 ‘숭고’의 감정이다. 뉴먼은 그 이후로 자신의 작품을 ‘숭고’라는 모티프를 중심으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는 ‘숭고’라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떠한 것을 재현하기를 거부한다. 미지의 힘이나 대 자연과 같은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이 무의미 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래비티에서 어떤 특수효과나 판타지를 집어 넣지 않고서도 우주라는 공간 자체만으로 영화를 완성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바넷 뉴먼의 커다란 단색 캔버스를 보고 있자면 그래비티의 광할한 우주를 떠올리게 된다. 창조의 근원이자 끝인 우주는 바넷 뉴먼의 작품에서 보이는 비 재현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공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작품 속에서 작아진 인간을 보며 인간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을 깨닫는다.
신기하게도 위와 같은 예시들 말고도 수 많은 영화와 미술은 서로 같은 주제를 놓고 이야기 한다. 즉, 우리 사회에서 의논해야 할 주제들이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공유하고 있는 것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머리아픈 미술의 철학적 이야기나 대학생들이 꼭 배워야 하는 ‘인문학’ 따위들이 별게 아니고 바로 이런 것들이다. 우리 사는 세상 이야기. 예술은 감사하게도 어렵게 풀어 놓은 줄글이나 듣도 보도 못한 철학자들의 이름들을 줄줄이 말해대지 않는다. 그냥 보고 느끼면 그게 인문학이고 철학이다. 이제 우리는 예술을 감상하며 철학과 인문학을 함께 느낄 수 있다. 영화나 미술을 넘나들며.

